제목 단체탐방 24 전국삼청교육동우회(구 전국 삼청교육진상규명투쟁위원회)
내용
"요즘처럼 맑은 하늘 보기 어렵고 모든 것이 눅눅하고 축축할 때는 이부자리까지 근질근질하여 어서 빨리 해가 나서 뜨거운 볕에 바짝 말려 봤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같다.

그런데 여기 20여 년이 넘도록 눅눅한 음지에서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각종 불량배를 소탕하고 밝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한다는 명목 아래 ‘삼청교육대’에서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다. 그간 삼청교육대에 대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해괴한 소문들은 많았지만 무엇하나 명확한 것은 없고 언론도 흥미위주로 그 잔인성과 포악함을 다루었을 뿐 삼청교육대의 진상규명과 그 피해자들의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답도 내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옛날 얘기를 잠깐 해보자. ‘정의사회구현, 복지국가건설’이라는 구호가 적힌 볼펜을 학교매점에서 팔던 시절, 휴일 한때 TV를 점령하던 ‘배달의 기수’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어느날 한 젊은이에 대해 다루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평소 일도 안하고 싸움질이나 하던 아들이 어느날 삼청교육대의 교육을 받게 된다. 머리를 빡빡 깎고 통나무를 들어올리고 엎드려 뻗쳐를 하는 아들의 머리 위로 너희는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관의 간절하고 따뜻한 훈시가 이어지고 아들의 얼굴 위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귀향하는 아들을 맞아 어머니를 비롯한 고향사람들이 두 손을 흔들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배경 속에 아들의 새 삶의 각오가 독백으로 흐르는 것이 그 간단한 줄거리이다. 그러나 이 엉터리 이야기의 진짜 배경에는 5공체제 출범을 위한 받침목으로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철저한 시나리오가 있다.

초헌법적인 이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군과 경찰에 할당량이 통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80년 8월 9일부터 4주간 기본순화교육으로 끌려간 3만 9천여 명의 사람들 속에는 고교생, 술값실랑이를 한 회사원, 평소 경찰관과 감정이 안 좋았던 사람, 목사, 교사, 현직 국회의원 6명을 포함한 사회운동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잠을 자다가 길을 가다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이들은 곡괭이로 머리를 얻어맞고 배를 걷어 채이고 하는 속에서 4주를 보낸다. 그러나, 4주가 지나 귀가를 애타게 소망하던 이들에게 ‘근로봉사’라는 명목의 자원서에 손도장을 찍는 것이 강요된다. 그래서 1/4 이상의 사람들이 강제노역에 처해지게 되고 강제노역에서도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은 80년 12월 18일 ‘사회보호법’ 하에서 1-5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받고 청송보호감호소에 보내진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문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도대체 이 계획이 실시된 배경은 무엇인가, 사망자의 숫자와 사망원인은 무엇인가, 건강한 젊은이가 갑자기 폐렴이나 복통으로 죽을 수 있는 것인지, 사망원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병명을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부상자의 숫자와 부상부위,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아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일상적인 폭력의 실상은 무엇인가, 순화교육→근로봉사→보호감호조치라는 단계적 변화의 배경과 선별과정 및 그 기준은 무엇인가, 삼청교육대에 대한 ‘기록폐기’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진상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주요 범법자들의 처단문제와 피해자들의 보상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삼청교육동우회에서 보여주는 신문스크랩이 누렇게 뜨고 얼룩이 진 그 시간동안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89년 광주문제와 분리되어 별도로 다루어지게 된 후 「삼청교육피해자 4천 54명 예상, 올해 안에 모두 보상」이라는 발표문만 있을 뿐 어디에도 보상을 받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89년 ‘전국삼청교육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94년 5월에 사회단체로 등록하게 되었다. 사회단체로 등록하면서 그간 지친 회원들의 결집력을 높이고 어려운 회원들에게 생활보조금이라도 지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보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현실은 어렵기만 하다.

삼청교육대에 대해서 최초로 91년 10월에 동우회 회원 96명이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고, 현재는 312명이 재판계류중이다. 그러나 재판이 지지부진 미뤄지고 있는 가운데 언제 재판이 끝나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는지 막막하기만 한 실정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을 1천9백90명의 이름으로 고발한 바 있고 청와대 면담요청과 국회 국방위원회에 공문을 발송하는 등의 일을 주로 해왔다. 동우회가 피해자신고를 받아 접수한 3천2백21명에 대한 통계를 보면 교육중 사망자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 397명, 상해자 2천7백68명, 행불자 4명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어림도 없다고 여기며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으나 동우회의 재정조건과 인적상황으로는 어렵기만 한 일이다. 집회도 열고 싶고 억울한 영혼에 대한 진혼제도 마련하고 싶고 부상자를 돌보고도 싶지만, 회원들 자신이 후유증으로 가족에게 버림받았거나(회원의 70-80%에 달한다고 함), 생활능력을 잃고 병상에 누워있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저곳에 면담을 요청하고 뛰어다닐 뿐이다.

그러나, 어디에 가든 ‘계류중이니 기다려라, 보상법이 처리되면 어떻게 해보겠다’하는 식으로 소관부처간에 떠넘길 뿐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광주문제와는 다르게 사회적 관심이 적고 오히려 ‘전과자’라고 매도하거나 과거를 들쑤신다는 냉담한 반응에 동우회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다. 이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감 떨어져라 하고 기다리기는 더 이상 힘든 일인 것 같다. 어느 때보다 과거청산의 문제를 높이 부르짖는 지금, 이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관심이 찬란한 햇살일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시대의 숙제를 푸는 일일 것이다.

<「인권운동사랑방」 류은숙>"
문서정보
문서번호 hc00010064
생산일자 1994-07-01
생산처 인권하루소식
생산자 류은숙
유형 도서간행물
형태 단신
분류1 인권하루소식
분류2
분류3
분류4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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