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편집자 주 : 제3차 아태 지역 유엔 인권워크샵이 ‘아태 지역 인권포럼’을 정례적으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지난 20일 3일간을 일정을 모두 마쳤다. 개막 전부터 이번 워크샵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비교적 상세한 보도를 해온 <인권하루소식>은 마지막 특집으로 이번 서울 워크샵의 성과와 의미를 분석한다.
아태 지역 인권문제, 지구촌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라
90년대 들어서 냉전이 종식되고 유엔의 기능이 부활하면서 인권문제가 지구적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수십 년을 지속해온 남아공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 국면에 접어들자 지구촌의 관심은 이제 아태 지역으로 쏠리고 있다. 아태 지역은 남북한 이외에도 버마, 부간빌, 중국,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등 거의 모든 나라가 심각한 인권문제를 안고 있어 전 세계 인권관계자의 특별한 주목을 받아왔다. 따라서 다른 대륙과 달리 아직 지역차원의 인권기구가 없는 아태 지역에 지역인권기구를 설립하는 문제는 유엔차원에서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였다. 90년 마닐라 1차 워크샵, 93년 1월 자카르타 2차 워크샵, 그리고 이번 서울의 3차 워크샵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다.
문민정부 인권외교의 시험장
이러한 국제적 흐름 이외에도 이번 워크샵이 서울에서 열리게 된 배경에는 김영삼 ‘문민정부’의 적극적 ‘인권외교’ 정책이 있다. 작년 2월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하여 ‘문민정부’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방어적 입장을 벗어나 인권분야에서 적극적인 ‘외교’를 하기로 방침을 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작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를 맞이하여 정부는 인권대사를 파견하였고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전 세계 정부대표와 인권운동가 앞에서 마치 한국에 인권문제가 더 이상 없는 것처럼 자신감 넘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한 장관의 선언은 비엔나대회 마지막 날 국내에서 발생한 조국교수 등이 「남한 사회주의과학원」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대회 후에는 이 대회에 참가한 노태훈 씨를 구속, 오히려 노씨를 국제적 저명인사로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한국정부의 인권외교정책은 사실 이번 서울 워크샵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즉 회의 첫날 한 부장관이 제안한 ‘정례적 아태 지역 인권포럼’은 내용의 추상성과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얄라 라소 인권고등판무관과 대다수 정부대표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한국보다 오히려 더 심각한 인권문제를 안고있는 아태 지역 대다수 국가에 비해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에 더 이상 불법구금 등의 인권침해가 없다”며 청와대를 예방한 아얄라 라소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앞으로 국제사회가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적극적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은 한국정부의 적극적 인권외교전략의 또 다른 사례이기도 하다.
인권외교의 이중성과 모순
그러나 이러한 한국정부의 인권외교 전략은 긍정적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먼저 지적해야 할 점은 인권에 대한 이중적인 기준이다. 최근 유엔 등 국제기구는 한국정부에게 인권침해와 관련하여 몇 가지 권고 안을 제시하였다. 92년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정부의 시민 정치적 권리(B규약)에 대한 최초보고서를 심의하고서 국가보안법의 단계적 철폐를 권고한 바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 가입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한 고문방지협약의 가입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다. 한편 올해 6월 말 국제노동기구도 한국의 제3자 개입금지 등이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배된다며 노동악법의 개정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계속되는 국제사회의 권고에 대해 실질적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최근 이 악법들이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권고를 무시하면서 오히려 국제사회로 하여금 북한인권문제 해결을 요청하거나 ‘인권외교’를 내세우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전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이제 국제인권의 기준으로!
‘인권외교’의 철학적 빈곤 또한 지적해야 할 문제이다. 한국정부의 인권외교는 70년대 말 미국 카터 정부의 어설픈 인권외교를 연상케 한다. 현재 인권이 중요한 국제문제로 등장하였고 한국정부도 인권을 외교정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인권문제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이를 다루는 방법이다. 경제문제는 국제정의에 입각한 ‘국익’에 따라 다루어야 하지만 인권은 ‘국익’이 아니라 인권자체로 즉 인류공동체가 준수하기고 합의한 국제인권규약의 기준에 따라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인권이 ‘정치화’되거나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이번 서울 워크샵의 한국대표는 박수길 외교안보연구원장이었다. 이는 한국정부가 아직도 인권문제를 외교와 안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정부대표들 ‘외교적’ 발언만 일삼아
이번 워크샵 기간에 국제인권협약 가입과 실행, 비엔나선언과 행동강령의 실천, 인권교육 등의 주제가 논의되었지만 역시 핵심적인 주제는 아태 지역 인권기구와 국민인권기구의 설립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번 회의의 결과는 사전에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인도, 중국, 일본 등 아태 지역의 지역강국이 지역인권기구에 대해 소극적 또는 부정적 입장을 계속 견지해왔고 사전에 이번 회의에서 특정국가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발언이 추상적이거나 외교적 언사로 일관했고 발언의 목적 또한 인권의 보호와 신장이 아닌 자국정부의 홍보나 체면 지키기에 머물렀다.
국민인권기구 없는 지역인권기구는 공허할 뿐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정보와 의견교환을 위한 정례적인 아태 인권포럼’이라는 빈약한 내용을 담은 한 장관의 제안조차도 합의하는데 진통을 겪었다는 사실은 지역인권보장제도의 수립이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정부는 한 장관의 제안으로 아태 지역 정부들을 상대로 ‘인권선진국’ 행세를 하였다. 그러나 워크샵 발표자들이 강조했듯이 제 구실 못하는 국민인권기구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지역인권기구 논의는 공허하고 기만적 일 뿐이다. 한국정부는 결국 이번 회의에서 지역인권기구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대가로 정작 국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국민인권기구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이 슬그머니 넘어가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지역포럼의 정례화합의로 인해 한국정부는 ‘해마다’ 국민인권기구의 문제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참된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권단체협의회」(상임대표 고영구, 인권협)를 비롯한 국내 민간단체들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서울 워크샵을 맞이하여 나름대로 준비를 하였다. 간략하게 성과와 드러난 문제점을 동시에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최대의 성과, 유엔 인권고등판무관과의 간담회
먼저 신속한 정보수집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다. 지난 5월 뒤늦게 알게된 한국정부의 A규약 보고서제출 사건에서도 경험했듯이 이번에도 회의를 불과 2주정도 앞두고 인권협은 회의일정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신 공안정국’의 대두로 바쁜 국내 대부분의 인권단체가 제대로 준비하기에 시간과 역량이 절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이지만 정확한 정보를 빨리 입수하는 것이 앞으로 국제인권연대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이번에 배운 셈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첫날 18일 아얄라 라소 인권고등판무관과의 간담회를 주선하여 한국의 인권상황과 「한국인권단체협의회」의 활동을 소개한 것이 향후 인권고등판무관과 유엔 인권센터와의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인권기구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
두 번째는 연구역량과 종합적 정책대안능력의 부재이다. 지역인권기구와 국민인권기구는 작년 방콕과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이미 중요하게 다루어진 주제였다. 그러나 정작 1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국내에서 두 주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제대로 없음이 드러났다. 후속작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민인권기구가 국내인권운동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며 앞으로 어떻게 이 이슈를 발전시켜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그나마 국민인권기구가 지금 전 세계에서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지고 있고 우리도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 정도로 이번에는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인권교육분야에서 한국유네스코와 협력가능성 확인
마지막으로 인권교육 분야에서 국내 유네스코와의 협력가능성이다. 지난 6월 20일 결성된 「한국인권단체협의회」는 인권교육이 앞으로 인권협이 주도적으로 전개해야 할 사업의 하나임을 밝힌 바 있다. 한편 유네스코 위원장 차인석 교수는 이번 워크샵에서 ‘현재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여 국제유네스코가 발간한 인권교육자료를 번역중이며 앞으로 인권교육문제를 주된 사업으로 전개할 것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사실 국제유네스코는 오랫동안 인권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과거 독재정권에서 한국유네스코는 인권교육은커녕 전교조가 교육권확보를 위해 힘든 투쟁을 벌일 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최근 제 기능을 서서히 회복한 유네스코가 인권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이번에 확인한 것은 귀중한 소득이었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인권교육 이외에도 인권이 제도교육내의 공식 교과과정에 반영되도록 하기 위하여 앞으로 유네스코와의 유기적 협력이 요청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