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인권하루소식 2천호 기획 ‘인권하루소식의 발자취’ (2) 1994년을 돌아본다
내용
"‘우루과이라운드’의 파도에 밀린 “국가경쟁력 강화!”의 아우성, 그리고 ‘북핵 위기’로 조성된 마녀사냥의 공포…. 보수언론에 의해 조장되어 모든 국민이 정신 없이 떠밀려간 그 광기의 세월을 우리는 ‘신 공안정국’이라고 부른다. 94년도 <인권하루소식>은 쏟아지는 공안사건들 속에서 지면부족에 늘 허우적거려야 했다. 


‘신 공안정국’이 왔다!

중등 교과서 개편안에 ‘10월항쟁’, ‘4 3항쟁’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3월쯤에 보수언론들의 ‘이념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이것이 ‘신 공안정국’의 서곡이었다. 뒤이어서 ‘이념서적’을 출판했다는 출판인들이 줄줄이 끌려간 4월에 노동부, 산자부 그리고 경찰청 등이 참여한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있었다. “산업현장에 침투한 좌경세력 색출”한다는 것이 결정사항이었다.

‘신 공안정국’이 본격화된 것은 6월 한총련 출범식부터였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대규모 경찰병력이 대학과 파업장 곳곳에 투입됐고 6월 한달 동안 구속된 인원은 215명. ‘문민적 정부’ 출범 후 1년 동안의 총구속자수와 맞먹는 놀라운 수였다.


광기의 마녀사냥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 후 “조의를 표시할 용의가 있다”는 한 국회의원의 발언을 계기로 ‘신 공안정국’은 ‘주사파 사냥’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서강대 박홍 총장은 91년에 이어 또 ‘히트’를 쳤다. “주사파 뒤에는 사노맹, 사노맹 뒤에는 (북의) 사로청, 사로청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이 유명한 발언이 있던 18일 전국 경찰은 한총련 학생 140명에 대한 긴급 검거령을 내렸고 그 다음 날에는 181개 대학 주변에 27,000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곧이어 나온 박홍 시리즈 제2탄은 “북한 장학금을 받은 사람이 국내 대학교수가 된 사례가 있다”였다. 대검 공안부는 경상대학교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가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등 이적성이 있다”며 수사에 착수했으며 대학당국은 즉각 이 강좌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 교재를 집필한 9명의 교수는 농성으로 맞서면서 소환을 거부하고 힘겹게 버티어 나갔다. 그것은 역시 공안세력의 무리수였던 것이다. 결국 장상환, 정진상 두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되었고 이후 ‘신 공안정국’은 수그러지기 시작한다. 1월부터 8월말까지 검찰과 경찰에 의해 ‘긴급구속’된 건수는 무려 4만 2천 건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소박한 요구들

94년은 공안한파 가운데서도 새 시대를 예고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욕구가 분출한 시기였다. 
새해 1월에 경실련 강당에서 농성에 들어간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최초로 그들의 요구를 공식화시켰다. 체불임금 지불, 산재 치료, 그리고 “때리지 마세요”. 그들의 요구는 눈물겹도록 소박했다.

눈물겨운 요구는 또 있었다. “매월 받는 6만 5천원의 생계보호급여로는 도저히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2월에 심창섭, 이금순 씨가 낸 이 헌법소원은 우리 사회 최초의 사회보장 관련 위헌소송이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참여연대의 국민생활 최저선 확보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권리의 새 영역을 열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94년 2월부터 시작된 경기도 가평 두밀분교 폐교 반대운동은 비록 성공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많은 국민에게 ‘개발’의 죄악과 교육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준 소중한 사건이었다. 

신 공안정국’의 아수라장은 뒤이어 터지기 시작한 공직자들의 대형 부정사건, ‘지존파’ 식의 초강력범죄와 성수대교 붕괴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국민이 공포 속에 94년을 보내고 났을 때, 그 자리에는 완전히 실지를 회복한 공안세력이 다시 여유 있는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문서정보
문서번호 hc00001052
생산일자 2001-12-11
생산처 인권하루소식
생산자
유형 도서간행물
형태 단신
분류1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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