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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2천호 발간을 맞아 ‘<인권하루소식> 이모저모’를 2회에 걸쳐 싣는다. ‘인권하루소식의 발자취 ⑥’은 20일부터 이어진다.<편집자 주>
‘미친 짓’이 현실로
“미친 짓이다”, “하루하루의 지면을 채울 사건이 있겠는가?”
처음 일간으로 인권소식을 만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이었다. “기사거리가 없으면 ‘오늘은 평화의 날’이라 하고 쉬지 뭐”하며 속 편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8년이 넘도록 지면을 채우고도 넘칠 만큼 <인권하루소식>(아래 <소식>)이 번창(?)하고 있는 현실은 ‘시대의 비극’이다.
<소식>의 모태는 이랬다. 93년 소위 ‘문민정부’가 등장했다고 일선 언론에서 인권뉴스는 찬밥도 보통 찬밥이 아니었다. 사랑방은 만연하고 있는 인권침해 사례를 소홀하게 다루거나 축소 보도하는 경향이 짙다고 판단, 소외된 목소리를 좀더 생생하고 크게 전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월, 당시 사랑방 활동가가 해외연락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여러 날에 걸쳐 긴급 소식지를 사방팔방 팩스로 날렸다. 예상외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강력한 연대의 힘이 나왔다. 그 덕분에 ‘간첩’이라던 그는 ‘이적표현물 소지’라는 공안당국의 체면치레 죄목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체험이 ‘팩스신문’의 아이디어를 가져다 준 것이다. 준비 24호를 거쳐 93년 9월 7일 “<소식>은 가진 것 없이 초라하게 출발”하지만 “진실을 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창간사 중)”.
돈 없고 잠도 없다
“편집진이 24시간 내내 일하느라 일주일에 한번 퇴근이 힘들 정도로 시달린다는데, 인권보장을 외치는 단체에서 인권활동가의 인권유린이 웬말입니까! 인권소식 몰아내어 활동가 인권 쟁취하자(창간 격려문 중)”
“복사기가 수명을 다했습니다”, “컴퓨터를 기증해 주실 분을 찾고 있습니다. 컴퓨터 부족으로 <소식>제작에 대단히 애를 먹고 있습니다(<소식>에 실린 광고들 중)”
빈약한 재정과 취재환경에서 <소식>은 ‘독종’이 돼야만 했다. 꼭 알려야 할 소식이 있으면 취재시간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에 24시간 내내 제작체계와 밤샘은 기본이었다. 한 예로 소위 ‘유서대필사건’의 강기훈씨가 만기 출소한 것은 94년 8월 17일 새벽 4시 10분, 미리 지면을 비워놓은 채 대기하던 <소식>의 기자가 대전교도소 앞에서 강 씨를 인터뷰하고 송고한 출소 소감 기사가 가장 빠른 보도였다.
‘신문’ 대접해준 공보처
A4 용지 2-3쪽의 팩스신문을 ‘신문’ 대접해준 것은 공보처였다. <소식>을 내고 얼마후 공보처는 ‘일간지인데 정기간행물등록법 규정을 어기고 있다’며 ‘정식으로 일간 신문으로 등록하라’는 공문을 보내 왔다. 또한 당시 서준식 발행인이 국보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고 집행유예 신분인 서씨가 피보안관찰자이므로 발행인 자격이 없다는 시비도 있었다. 이에 <소식>은 “우리는 윤전기도 없어 등록할 수도 없지만 정간물등록법 자체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므로 등록요청을 따를 의사가 없다”는 요지의 답신을 보냈다. 그후 공보처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 없는 독자들
밤을 새고도 <소식>의 제작이 늦어지는 날이 종종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걸려오는 ‘얼굴 없는’ 독자의 전화. “왜 아직 안나오는 겁니까?” 십중팔구 경찰이거나 기관원이었다. <소식>을 동향보고의 으뜸자료로 삼는 그들에게 <소식>의 늑장발간은 큰일이었나 보다. 기관원들은 ‘00상사’라거나 정체불명 단체의 이름을 빌어 구독을 계속했다. 93년 안기부 요원이 정식으로 구독요청을 해왔을 때 기자가 거절했다. 그리고 오간 대화, “발행인 좀 바꿔주세요”, “못 바꿔요”, “왜 못 바꿔요?”, “그럼 안기부장하고 통화 좀 합시다. 그거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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