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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WTO/투자협정 반대 국민행동(KOPA) 토론회에서 우리 단체가 발제를 맡은 일이 있었다. 토론회장에 도착해서야 그 날 사회자가 ‘100인 위원회’에서 발표한 16명의 성폭력 가해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토론회 준비팀에 “우리 내규에 반여성적 단체나 활동가와는 연대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 사회자를 바꾸지 않을 경우 발제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토론회 시작 직전이라 설마 했는데 의외로 사회자를 바꾸겠다고 응답했다. 쾌거였다.
사실 삐끼스(PICIS)와 같은 작은 단체가 연대사업 안 하겠다고 선언해봤자 별 위협(?)이 안되겠지만 민주성, 남녀평등성, 반권위주의성 등 일상적이고 비공식적인 영역에서의 정치성을 고려한다는 연대의 원칙 하에 지금껏 관계를 청산한(?) 조직과 활동가가 적지 않다.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이 중단되지 않는 현실의 한 켠에는 가해자를 제멋대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운동사회의 관성적 풍토가 들어서 있다. 성폭력 근절 구호를 수백 번 외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활동의 마디마디에 그 정신을 관철시키는 것이 시급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최근 삐끼스의 주요현안은 활동가 충원이다. 어느 단체나 활동가를 충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겠지만, 삐끼스의 경우는 좀더 까다롭다. 출신학교별로 3명씩만 받고, 여성이 전체 활동가의 반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내규상의 규정 때문이다. 운동사회의 학력주의(특히 서울대주의)가 배타적인 파벌을 형성하고, 더욱이 남성들만의 네트워크의 근저로 작용되어왔다는 반성에서 제정되었다.
“비서울대 출신 여성활동가를 모집합니다”라는 활동가 모집광고를 보고 온 한 여성활동가는 “업무상의 능력은 개의치 마십시오. 같이 배우면 되니까요”라는 문안이 제일 감동적이었는데, 막상 활동해보니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내규에는 엄연히 ‘상호자원 나누기의 원칙’을 두고, 서로 다른 자원, 정보, 능력 등을 환류하자고 했지만, 여전히 활동가 개개인이 여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데 나 또한 동의한다. 영어가 대표적이다. 업무의 태반이 영어와 관련되어 있지만 독자적인 활동가 교육 프로그램도 없으며 술자리에서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는 것만큼도 서로 민감하지 않다. 장벽이 없다고 하지만 은밀하게 철책을 두르고 있는 꼴이다. 경제적 능력 풍부하고, 국제적 이슈에 해박하며, 영어에 능숙한 사람들만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조직이 되어갈 때, 내규의 정신인 친여성적/반위계적/자율주의적 운동은 사라진다. 새로이 활동가를 모집하는 광고 문안을 고민하면서 들어선 반성이다.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PICIS, 운동사회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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