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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었어.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팔딱팔딱 뛰고 벌렁거려서 말이 안 나와. 하루에 일곱 번씩 (조사실로) 끌려가 맞고, 두 번씩은 까무라치곤 했었다니까. 고무호수로 패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에다 붓고…. 어휴, 말도 못해."" 주름진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짓는 김분년 씨(69)는 80년 사북의 봄을 이렇게 떠올린다.
사북항쟁 23주년을 맞은 4월 22일. 하지만 지금까지도 80년 4월의 사북은 '무지렁이들의 폭동', '술취한 광부들의 난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이 있기 한 달여 전인 이날, 강원도 사북의 광부들과 가족 6천여 명이 어용노조의 퇴진과 노조 직선제,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벌였던 사북노동항쟁. 그러나 이 항쟁은 경찰과의 투석전, (어용이었던) 노조지부장 부인 린치사건을 전면에 내세운 언론과 신군부에 의해 '난동', '폭동'으로 규정됐다.
당시 주동자로 몰렸던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그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말도 못한 채 20여 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내다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감독 이미영)의 제작과정을 통해 비로소 말문을 열고 서로를 다시 묶어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주동자로 몰린 사람은 모두 81명이었지만, 연락이 닿은 30여명만이 모여 2001년 9월 '사북노동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아래 추진위)를 꾸리고 매년 사북에서 기념식을 갖고 있다.
이날 10시 30분, 항쟁 23주년을 기념해 추진위와 강원도 지역단체가 함께 마련한 갱목 행진과 기념식에서 이원갑 씨(80년 당시 반(反) 어용노조측 위원장 후보, 현 추진위 위원장)는 ""땀흘린 만큼 대가를 받고 인간 대접 받으며 일하고 싶었을 뿐인데, 폭도로 매도당했다""며, ""사북의 노동항쟁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리에 함께 한 추진위 회원들도 하나같이 20여년간의 고통을 호소하며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강윤호 씨(56)는 ""노동운동을 폭도라고 끌어다가 패면, 누가 노동운동을 하겠냐""며 ""20년 동안 손가락질 받으며 직장도 못 얻고 고생해 왔는데, 이제라도 똑같은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도 않은 일로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는 강 씨는 ""탄광에서 쓰던 폭발물을 보관하던 무기고를 파손했다는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13개월이나 복역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군에 내 이름을 알려 준 사람도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노라고 작년에 무릎 꿇고 울었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을 털어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사북항쟁 참가자 5명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 신청서를 냈지만, 아직까지 심의위원회는 어떠한 결정도 내놓지 않고 있다. 청와대와 각 정당에 제출한 명예회복 청원에 대한 답변 역시 기약이 없는 상태다. 추진위는 사북항쟁 참가자들의 정당한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이 개정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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