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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박원순의 글은 지난 2일 기독교장로회 주최 '반민주 반통일 악법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의 강연내용입니다.
1. 서 론
김영삼 정부의 출범과 함께 인권운동은 활기와 관심을 잃었다. 그동안 인권운동에 종사해오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손을 놓거나 보다 인기 있는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하에서 인권문제는 더 이상 활발한 동력을 제공하는 운동의 이슈에서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인권사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인권을 감시하고 담당하던 부서들이 아시아워치 등 우수한 세계인권단체에서 해체되고 있으며,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활동을 벌이던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한국을 떠나 필리핀, 버마, 중국 등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한국의 인권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구원의 손길이 끊어진지 오래이며 세계각지의 인권상황을 평가하는 보고서 등에서도 한국은 아예 빠지거나 대단히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작년도 아시아워치 세계인권보고서에는 일본의 인권에 대한 논평부문은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새 정부의 인권개선정책에 맞물려 있다. 군부독재의 연장선상에 있던 노태우 정권 하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권력의 남용이 상당부분 시정되기 시작되면서 인권문제가 언론과 사회의 관심사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이다. 정부에 의한 인권의 개선과 인권운동의 활성화는 사실상 반비례 관계에 있어 왔던 것이 현실이다. 인권수준의 향상이 인권운동의 활력을 삭감시키면서 역설적으로 인권운동의 어려운 여건을 가져온 셈이다. 우리 사회의 인권상황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선되어 인권운동이 약화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불가피하고도 바람직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정부는 더 이상 한국에서 인권이 문제될 수 있는 상황은 지났다고 거듭 천명해왔다. 한승주 외무장관은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세계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여기 우리들이 세계인권회의에 모인 자리에서 나는 한국에서 인권이 드디어 성숙에 이르렀다고 알릴 수 있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진실,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가 마침내 승리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국가와 국민을 대표해서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숙한' 인권, '승리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가. 따지고 보면 그것은 턱없는 만용이며 과장이다. 이미 수백년을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인권을 위해 노력해온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법제도의 개혁과 인권사건의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는 마당에 이제 민주주의적 문턱, 인권의 초보적 단계에 들어선 우리가 그토록 자만할 사정은 아닌 것이다. 그 자만할 수 없는 사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권운동이 결코 쇠퇴하고 사라질 수 없는, 그리고 사라져서는 안될 이유는 무엇인가?
2. '문민정부'의 이름에 값하지 못하는 인권상황
오늘 이 땅에 마치 모든 인권문제가 사라지고 자유와 정의가 보장된 유토피아적 사회가 다 된 것인양 일반 국민들이 인식하게 된 배경에는 이 정부의 과대 홍보정책과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언론의 몰인권적인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 의해 이제 인권문제를 들먹이는 것이 마치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 하에서 인권의 어느 측면이 개선되고 발전하였는가. 민가협은 여전히 300명이 넘는 양심수가 갇혀 있고 4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장기수가 있는 나라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감옥은 전향의 강요와 비민주적인 억압으로 가득 찬 행형제도로 움직여지고 있다. 아직도 안기부에서 성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고발이 있으며, 책 한권 소지하였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사람들이 잇따르고 있다. 구시대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던 수백명의 유가족들이 아직도 진실을 갈구하고 있고 고문의 희생자들의 절규가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최근 한국의 인권상황을 조사하러 방한했던 국제 앰네스티 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것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문민정부 출범 후 개혁조치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왔으나 인권침해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 우리들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보법의 존속, 안기부의 불법체포 등의 만행, 구정권하의 인권침해에 대한 청산노력의 부족 등이 인권개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토록 많은 양심수를 낳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하였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악법들이 끄덕하지 않고 남아 있다. 수사시 변호인의 입회권, 재정신청제도의 확대 등 피의자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기초적 제도를 도입하는 형사소송법의 개정 역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민의 원한이 사무쳤던 안기부와 경찰의 대공부서의 실질적 개편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최후 보루로서 그 사명을 저버렸던 사법부와 권력의 시녀가 되어 인권남용에 앞장섰던 검찰의 책임 있는 법관과 검사들이 그에 대하여 응징과 면식 받은 바 없다.
무엇이 개혁이고 개선인가. 인귄의 실질적 보장이 뿌리내릴 수 있는 법과 제도의 정착, 인권남용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 관행의 확립, 항상적인 인권단체와 국민의 감시체제 구성없이 개혁과 개선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성과는 없이 마치 모든 개혁이 이루어지고 인권문제는 사라진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더 큰 인권의 위기상황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 인권의 실질적 담보조건은 아니다. 어차피 인권은 한 개인의 문제로 구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땅, 이 한 밤, 단 한 명의 고문 받는 형제가 있더라도 나머지 만인은 편히 잠잘 수 없다. 단 한 명의 인권, 그것이 무너질 때 우리 모두의 인권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문민정부'라는 이름 아래 무너지고 있는 인권은 한두 명에 그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또다시 우리 사회의 최대공약수이자 지난 시대의 교훈이었던 인권의 존중이라는 기본적 가치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과거 인권의 대량유린을 가능하게 하였던 수많은 법제와 기구, 관행과 인원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언제 다시 그 희생자가 생겨날 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미 생겨나고 있는 사례들은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을 정당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3. 인권운동의 새로운 전기
이와 같이 정부의 인권정책이 대단히 미온적이고 소극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인권단체와 사회운동단체들은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이미 본대로 변화된 정세 속에서 인권이라는 이슈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인권운동을 담당하고 이끌어갈 인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과 관련하여 인권운동이 제자리를 찾고 우리 사회의 인간화에 공헌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조건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첫째, 새로운 자질을 갖춘 인권운동가들이 배출되어야 한다. 종래의 인권운동은 엄밀히 말하면 정치적 운동의 한 요소와 수단으로 기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인권의 남용과 악화는 결국 부당한 군부독재정권의 존재에 연유하였던 것이므로 이 정권의 타도야말로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권운동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인권운동과 정치운동의 경계가 제대로 서지 않았으며 전문적인 인권운동가가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인권문제를 심층적으로 조사 분석 보고 연구 고발하고 법제 관행의 변화를 위한 대안마련의 역량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 이러한 임무를 담당할 전문적인 인력양성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둘째, 인권운동의 대중적인 방식을 개발해내야 한다. 종래의 인권운동은 권력기관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러 주기를 기다려 그것을 문제삼고 성토하는 소극적인 방식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이제 어느 분야, 어느 인권이 문제인가는 직접 찾아 나서 이를 대중과 언론에 널리 알리고 이를 움직여 진상조사운동, 국회를 통한 입법활동, 소송 등을 통한 문제제기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사법부 감시운동도 조직되어야 한다. 이제 '주먹'보다는 '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중을 설득하고 촉발할 수 있는 광범하고도 다양한 방식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셋째, 인권운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종래 국가권력기관에서 빚어지는 가혹행위, 그것도 시국사건에 인권운동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인권이 유린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손상 받는 곳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이름 없는 서민들의 고통도 외면할 수 없다. 여성들의 인권, 장애자의 권리,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등이 모두 함께 중시되어야 한다.
넷째, 인권활동의 국제적인 장에 적극 개입하여야 한다. 인권운동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보편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국제적 지역적 협력 없이 전개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인권침해로 고통 당할 때 전 세계가 보여준 관심과 지원을 갚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국제인권법은 구경하고 방관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법질서로 전환되고 있다. 국제인권규약은 우리 정부의 비준에 의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어 우리 사법부가 재판의 준거로 상용할 법적 의무를 지고 있다. 이와 같은 규약에 근거하여 유엔인권위원회에 활발한 제소를 함으로서 우리의 법체제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자세와 인식이다. 과거의 독재정권 하에서는 이런 인권문제라도 정당한 조사와 해결을 차단 비호하려는 정치권력에 의해 정치적 성격을 띠고 곧바로 큰 관심과 영향을 우리 사회에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의 청산과 함께 인권문제는 인권문제 그 자체로서 남게 되고, 그 파장이 정치권에까지 미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작은 인권의 이슈라도 꾸준하게 제기하고 언론과 사회의 양심에 호소하는 지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문제라도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인 한 간과할 수 없다. 작은 것이 소중하고 위대한 것이다.
4.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
-투쟁 없는 인권 없고 희생 없는 자유 없다.
오늘날 김영삼 정부 하에서 고창되고 있는 개혁과 문민이라는 구호에 의하여 인권문제는 정부 자신에 의해 확고히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권력과 정부가 스스로 국민의 인권을 완벽히 보장하고 실현하는 예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국민 스스로에 의한 헌신과 투쟁 없이 인권이 제대로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도 지난 시대, 그 암흑한 동토의 계절에 신명을 바쳐 투쟁하고 노고를 바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인고의 세월이 끝나고 정부가 개혁을 통해 인권을 보장해주는 시대가 되었다는 인식만큼 위험천만한 사고방식도 없다. 우리가 누리는 이만큼의 자유와 권리도 그것을 끝없이 지켜내고 신장시키고자 하는 불침번의 노고가 없다면 그것마저도 안전하지 못하다.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Liberty is the price of eternal vigilance)라는 표어는 미국의 가장 큰 인권단체인 미국인권옹호연맹(American Civil Liberty Union)의 정문 앞에 써 붙여 있는 구호이다. 오늘 우리가 새로운 인권운동을 향한 장정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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