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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3일 대법원에서 우리를 한참 동안 어리둥절케 하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그것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반대의견을 현수막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판결문을 읽어보면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대한 주장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주장을 다수의 시민들이 통행하는 장소인 현수막 게시대에 거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겠다고 한 경우에는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했을 것인가. 아마 대법원은 당연히 그러한 현수막은 게시되어야 한다고 판결했을 것이다. 대법원의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정말 어이가 없다. 국가보안법 존폐 문제를 포함한 모든 정치적 주장에는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되는 내용을 담은 표현을 문제삼아 그 게시를 제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명백한 '사전검열 금지 위반'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헌법 해석의 충돌이 일어난다. 판결문에서 수호하고자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핵심적 내용이 바로 표현의 자유임을 법률가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판결문이야말로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판결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이 판결은 재판부가 국가보안법을 헌법의 상위법으로 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표현이 판결문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항은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이 법의 목적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파괴에 대처하기 위한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재판부는 또한 판시이유 중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을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이 헌법에 위배하는 법률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의 또한 적지 않은 것이므로, 이 법이 반민족·반통일·반인권적 악법이라고 비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재판부가 국가보안법을 극단적으로 신성시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할 수조차 없는 법이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상위법인 헌법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상식인데, 국가보안법이라고 해서 비난하지 못할 법적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판결은 대법원이 구시대적 냉전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체 국민의 70%가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주장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왜곡하고 있는 대법원의 태도가 너무나 답답하다.
(이창호 님은 경상대 법학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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