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길가는 평범한 시민을 붙잡고 “당신은 어떤 것을 인권침해라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고 하자. 어떤 답이 가장 많이 나올까? 아마도 수사기관이나 교정 기관이 저지르는 불법 체포, 가혹행위를 지목하는 사람이 가장 많지 않을까? 이는 아마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많 은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되고 보편적인 인권침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서에서 맞을 경우
수사기관이나 교정 시설에서 불법체포, 가혹행위를 당한 개인이 어떻게 하면 국가인권위원회를 이용해 신속한 인권침해 구제를 받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홍길동 씨가 시위 현장을 지나가다 불심검문을 받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 받다 ‘건방지다’며 형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 마침 경찰서에 들렀던 사람중 홍 씨를 아는 사람이 있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이 때, 인권위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우선 관련 경찰서장에 지금 벌어지는 가혹행위를 중단하고 현장을 보존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직 내부 비리를 덮어주는 걸 의리라 여기는 경찰의 속성상 권고를 이행하기보다 증거인멸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권위가 직접 나설 수도 있다. 인권위 직원들이 현장에 뛰어가 구타하고 있는 형사들을 제지하고 증거를 수집하며 피해자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다. 이 경우 관련 경찰서 직원들이 동업자 의식을 발동해 인권위의 조치를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방해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긴급구제 조치권을 실속 있게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실 관계를 조사해 가담 정도가 무거운 사람은 검찰에 고발하고 가벼운 사람에겐 징계를 권고하고, 더 약한 경우에는 조정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고발이든 징계권고든 조정이든 권고를 받은 쪽에서 거부하면 다른 강제 수단이 없다. 권고적 효력의 한계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권위는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홍 씨를 구타하는 데 소극적으로 가담한 형사를 징계하라고 권고했다고 하자. 물론 권고를 받은 경찰서장은 이를 이행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결과와 이유를 인권위에 통보해야 한다. 인권위는 경찰서장이 통보한 이행조치 결과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론에 공포해 여론을 압력 수단으로 동원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인권위의 권한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을 수도 있다.
인권위, ‘강제권’은 없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조사 절차에 있다. 인권위원들이 ‘구타 형사’를 바로 불러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반드시 서면 진술서를 먼저 받고, 진술서를 검토한 뒤에야 ‘구타 형사’를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서면 진술서를 제출하라고 ‘구타 형사’에 통보하고, 진술서를 받고, 진술서 내용을 판단해서 출석 통보하다 보면 2개월이 후딱 지나가 버린다. 긴급구제 조치를 취한 경우라면 인권위가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채집한 후라 시간이 늦춰지더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권위에 진정하는 사건의 99%가 과거에 일어난 일들임을 감안하면 서면조사우선주의는 인권위가 현안에 대해 신속히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혹행위 등을 한 경찰관이나 검사까지도 인권위에 불러 조사할 수 있다. 달리 생각하면 검사가 인권위에 불려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 되어 억지 효과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면전 진정권 등 보장
구금 보호시설에서 일어난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교도관에게 두들겨 맞은 재소자는 서면으로 또는 교도소를 방문한 인권위원에게 직접 자신이 당한 사실을 진정할 수 있다. 진정을 방해하거나 밀봉한 진정서를 뜯어본 교정 시설 직원은 형사처벌을 받는다. 또한 면전 진정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할 시행령을 인권위가 제정하도록 되어 있어 재소자 진정권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을 접수한 인권위가 조사에 나섰을 때는 수사 기관의 인권침해와 동일한 문제가 생긴다. 구타 교도관을 바로 부를 수도 없고, 조사 결과에 따른 조치도 강제력이 없다.
인권위의 효력, ‘일반조사권’
오히려 인권위가 가진 효과적 수단은 개별사안에 대한 조사권보다 ‘일반조사권’일 것이다. 인권위는 불법 수사 관행 및 실태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해 이를 바꾸도록 권고할 수 있다. 또한 법령이 만들어지기 전이거나 사안의 특성상 법으로 강제하기 힘든 경우 지침을 제시할 수 있다. 성폭력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과정에서 ‘음흉한 눈빛이 뭐냐’는 물음이 인구에 회자된 적 있다. 인권침해를 둘러싼 기준이 제정과정에도 비슷한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 불법은 아닌 데 그렇다고 넘어가기는 좀 그렇고 딱히 객관적 기준을 세우기도 어려운, 수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폭력이나 고압적 태도 등 경계가 모호한 것들에 대해 인권위가 권위 있게 기준을 마련해 제시하는 건 사회전반에 강력한 학습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수사절차 및 행형법 관련 법제를 연구해 국제인권기준에 맞지 않는 법제를 개선하도록 권고할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