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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두두두~ 찌익, 쿵."" 기습을 당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진정시킬 여유도 없이 날카로운 굉음이 귓전을 울리더니 또다시 포탄소리가 난다. ""쿵~~"". 주먹을 꽉 움켜진 두 손에 땀이 촉촉이 베었을 때, 펄럭이는 주황색 깃발 뒤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2003년 8월 다시 찾아간 매향리(경기도 화성군 우정면)는 아직도 전장이다.
날마다 전쟁, 반세기 매향리의 비극
2000년 5월 엔진고장을 일으킨 미군 전투기가 아무런 사전 경고없이 폭탄 6발을 마을에 투하하면서 매향리 주민 6명이 다치고 농가 7백여 가구가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통해 반세기에 걸친 매향리의 비극이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미군 전용 폭격장이 들어선 이래 오폭사고로 사망한 주민만도 10명. 임산부의 잦은 유산은 물론이고 폭격 굉음으로 인한 자살과 극도의 스트레스, 중금속으로 오염된 갯벌 등 매향리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폭격장이 만들어진 이래 반세기동안 공휴일을 제외하곤 단 한번도 폭격이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전투기가 하루 동안 쏟아 부은 포탄만도 9백여 발, 여기에 주민들이 살고있는 거주지마저 사격 가능한 지역으로 포함돼 있다 보니 주민들은 매일같이 전쟁의 포성과 폭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매향리에서 나고 자라나 이러한 현실을 '천형'처럼 받아들였다는 전만규(47, 매향리 주민대책위원장) 씨는 아버지의 자살을 지켜보면서 싸움을 결심했다.
이렇듯 원한처럼 하나 둘 쌓여온 주민들의 분노는 88년 사회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폭발했다. 주민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1천여 명의 주민들이 3차례나 미군기지를 점거하는 등 적극적인 투쟁이 전개됐다. 하지만 미군과 한국정부는 경찰과 무장군인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고, 주민 2명을 구속시켰다. 그 후 주민들은 심한 무기력증에 빠졌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가 너무도 처참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들불처럼 일어난 2000년 폐쇄투쟁
하지만 2000년 5월 사건 이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다시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마을에선 대규모 시위가 잇따랐고, 대학생과 종교인 등이 폭격중단을 요구하며 폭격장을 점거했다. 각계인사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국제적인 연대집회가 열리는 등 매향리 폭격장 폐쇄를 위한 투쟁은 들불처럼 번졌다. 한미합동조사단이 ""폭탄투하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없다""고 밝혔을 때는 분노한 매향리 주민 3백여 명이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고된 투쟁은 성과를 남겼다. 51년 폭격장이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40여 일간 폭격이 중단되기도 했으며, 육상 폭격장을 폐쇄하는 전대미문의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바다 앞 해상 폭격장은 끝내 폐쇄되지 않아 지금도 매일같이 폭격이 계속되고 있다. 폭격으로 오염된 바다와 폭격장에 묶여있는 농사 터도 이들의 생활을 계속 고통에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아무런 문제해결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정부 역시 넘기 힘든 또 하나의 산이다. 그렇게 매향리의 시계는 2000년에서 멈춰 서 있다.
매향리는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소산
<불평등한소파개정국민행동>의 공동대표인 문정현 신부는 ""상호방위조약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평등하게 개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향리의 해법은 없다""고 강조한다. 매향리 범국민대책위 김용한 집행위원장 역시 ""매향리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로부터 시작된, 이 땅 민중들이 겪고 있는 숱한 고통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미군은 국내에 기지나 폭격장을 무기한 사용할 수 있으며, 환경피해 등에 대한 아무런 배상 책임이 없다.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소파가 개정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현실에 마침표를 찍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평등한 소파의 문제는 비단 매향리뿐 아니라 지난해 6월 두 여중생 압사사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당시 가해 미군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는데, 소파 규정에 따라 미군의 공무 수행 중에 벌어진 사고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연일 전국적인 소파개정 촉구 집회가 계속됐지만, 불평등한 소파협정은 여전히 위세를 잃지 않고 있다.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주민들
현재 밖으로 보여지는 매향리는 고요하기만 하다. 하지만 주민들은 가슴에 '칼' 하나를 품고 산다. 2000년 맹렬한 싸움에도 꿈적하지 않는 미군과 정부를 보면서 한동안 절망감에 술만 펐다는 마을 주민 김모 씨는 ""내가 뒤지든지 폭격장이 뿌사지든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미군이 저리 버티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주민들은 '숙명'처럼 투쟁을 준비한다. 주민들은 지난 7월 ""오는 10월말까지 폭격장을 완전히 폐쇄하지 않으면 주민통제 철책선을 끊고 폭격장을 점거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한편으론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98년 주민 14명이 매향리의 소음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대법원 결정이 새로운 투쟁의 도화선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 소송에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폭격 소음으로 인한 각종 침해행위는 사회통념상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라며 모두 1억3천여 만원의 위자료를 주민들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결과에 힘입은 매향리 주민 2천2백여 명은 국가를 상대로 유사한 내용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평생을 어부로, 농사꾼으로 살아온 이들의 투쟁이 6km에 이르는 매향리 '쿠니 폭격장'의 철책을 다 걷어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때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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