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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안기부 해외공작국 직원들에게 지시문이 하달됐다. ""북한 공작원인 부인이 나를 납북하려 했다""고 횡설수설하던 윤태식 씨가 단순 살인범에서 반공투사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2001년 말에 이르러서야 검찰수사로 진실이 밝혀졌지만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국가기관에 의해 은폐·조작된 각종 사건들의 진실이 오랜 시간이 지나 밝혀졌지만 가해자들은 떳떳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현재 국회 법사위에는 국가에 의해 저질러진 이러한 반인권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배제하려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2002년 5월 이주영 의원(한나라당)의 발의로 제출돼 있다. 개정안은 △국가기관이 직무상 폭행이나 가혹행위를 저질러 상해를 입히거나 사망케 한 행위 △전쟁이나 테러에 의한 민간인학살 행위 △국가기관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행한 증거인멸, 범인도피, 직권남용 등에 대해 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했다. 또 국가기관의 고의에 의한 증거조작이나 은폐행위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었던 기간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되도록 했다.
이 외에도 김원웅 의원과 송영길 의원(이상 열린우리당)이 각각 제출한 시효배제 촉구 건의안과 특례법제정 청원도 계류중이나 심의가 진척되지는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법사위 관계자는 ""공소시효 배제 문제는 형사법 체계상 매우 예외적인 것이어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정도로 중요한 비중의 사건이 아니면 논의조차 안 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현재 법사위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관한 로마규정' 비준에 따른 정부의 이행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되면 통합해서 논의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입법에 미온적이기는 법무부도 마찬가지이다. ICC는 집단학살과 전쟁범죄,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 해당 나라가 처벌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을 경우 기소할 수 있는 국제사법기구로, 한국은 2002년 11월 이것의 설립을 위한 로마규정을 비준했다. 법무부는 로마규정의 '시효부적용 원칙' 등을 수용하는 국내 이행입법을 위해 지난해 9월 '국제형사재판소 관할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초안을 마련했으나 16대 국회가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까지 입법예고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초안은 ICC 관할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관할범죄에 해당되지 않는 국가기관에 의한 살인·폭행·가혹행위, 사건의 조작·은폐 등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나 시효 정지 등의 조항이 꼭 포함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새사회연대 이창수 대표는 ""로마규정을 비준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제대로 된 이행 입법을 만들지 않고 있는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인권후진국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며 시효배제 입법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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