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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버나드 마넹/ 옮긴이: 곽준혁/ 펴낸곳: 후마니타스/ 302쪽/ 2004년 4월
제목을 보고 대의제의 한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기대한 독자라면 아마도 책의 내용에 실망할 듯 싶다.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대의제를 넘어서자는 직접적인 주장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애초 민주주의와는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됐던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자리잡게 된 과정과 그 작동원리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집중한다.
흔히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의 차이를 국민 소환권과 발의권의 보장 여부에서 찾는다. 그러나 저자(뉴욕대 정치학 교수)가 보기에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제와 구분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통치자의 '선발 방식'에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행정관, 시민 평의회 위원, 판사와 배심원 등을 '추첨'(제비뽑기)을 통해 무작위로 임명했다. 자격없는 시민이 공직에 앉게 될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들이 200년 동안이나 추첨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첨을 통한 통치자의 끊임없는 교체만이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간극을 좁히고 전문가 집단에 의한 권력 집중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또한 추첨은 원하는 시민 누구에게나 통치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동일한 확률을 보장하기에 민주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추첨제도는 근대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갑작스럽게 그리고 조용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반민주적이라고 여겨졌던 선거의 절대적 지배가 확립됐다. 저자는 '동의'야말로 합법적 권위의 유일한 근원이며 정치적 복종의 근거라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던 자연법 이론의 역사적 승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추첨은 동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선거가 역사적으로 승리하자 민주주의는 권력에 대한 인민의 동의로 축소되고, 대표는 선출한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더 뛰어나야만 한다는 '탁월성의 원칙'이 작동된다. 선거는 결코 공직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지 않으며 정치 엘리트들과 시민의 간극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선거는 모든 시민에게 통치자를 임명하고 해임할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며 대표가 여론에 어느 정도 구속되도록 만드는 민주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선거의 야누스적 성격을 면밀히 그려내는 동시에 추첨이라는 잊혀진 민주주의 실현 방식을 환기시킨다. 민주주의의 확장은 '선거+무엇'으로 실현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추첨과 같은 '선거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실현되어야 하는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쉽게 풀리지 않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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