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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12조 제4항. 정도의 차이를 따질 모호함도, 선언적인 추상성도 담지 않은 명쾌한 권리보장을 담은 내용이다.
'빈곤' 앞에서 작아지는 헌법의 권리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나'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선 변호인 선임에 따르는 엄청난 수임료를 부담할 수 없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애초부터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서 배제되고 있다.
<형사 변호인 선임 현황 2002년>
전체 피고인수 : 278,583명(100%)
사선 : 90,161명(32.4%)
국선 : 68,334명(24.5%)
변호인 선임 피고인 수(사선+국선) : 158.459명(56.9%)
(대법원 사법개혁위원회 회의자료 2004.4)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선변호인이든 국선변호인이든 변호인을 선임한 경우는 전체 형사 피고인 중 56.6%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43.1%에 이르는 12만 명이 넘는 형사 피고인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한 채 공판을 진행하게 된다. 형사 피고인의 변호인 선임율이 96.3%(사개위 자료)인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낮은 수치이다. '명쾌한' 헌법의 규정이 무색할 뿐이다.
형사사건에서 누구나 변호인의 조력이 필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장에 수사와 재판에 임해야 하는 피의자와 피고인은 전문적인 법률 조력이 절실하다. 더욱이 우리의 초중고 교육기관 어느 곳에서도 형사소송의 과정과 적법절차를 시험문제 이상으로 알려주지 않는 현실을 고려할 때, 개인의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면 형사소송의 절차와 법률적 대응은 너무도 생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변호인을 두지 않고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가 이처럼 많은 것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무죄를 다퉈야 하는 형사재판에서도 가난한 피고인은 자신을 충분히 방어할 수가 없다.
물론 형사소송법에서는 '경제적 빈곤이나 기타의 사유'를 비롯해 △미성년자 △70세 이상의 고령자 △농아자 △심신장애가 의심되는 자 △사형 무기 또는 단기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 등에서 법원이 직권으로 국선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단, 경제적 빈곤이나 기타의 이유는 피고인의 신청에 의해 법원의 판단에 따라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
피고인뿐 아니라 피의자도 변호인 필요
헌법에서 규정한 기본적 인권인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국선변호인제도가 도입됐지만, 필요적 국선변호의 범위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됐다. 따라서 지난 2003년 10월 법무부 정책위원회는 이미 필요적 국선변호의 범위를 '구속영장이 청구되어 영장심문을 실시하는 모든 피의자'로 하도록 권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법무부는 그 범위를 '구속 피고인'으로 한정해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마련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피고인이 불구속인 상태가 구속의 경우보다는 자기방어에 자유로울 수 있지만, 전문적인 법률 쟁점을 다투는 재판에서는 구속 피고인뿐만 아니라 불구속 피고인도 변호인의 전문법률 지원은 절실하다.
더 나아가 구속 피의자와 불구속 피고인만이 아니라 '구속영장 청구 이전의 피의자'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도록 해야 한다. 체포와 수사 초기부터 조사담당자와 대등한 관계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피의자 심문과정에서 변호인 참여'를 시행하고 있는 마당에, 법무부가 구속 피고인에게만 필요적 국선변호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인권보장의 취지에 맞지 않다. 구속과 불구속의 여부에 관계없이 피의자 신분에서부터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시급하다. 법무부가 형사소송 개정안으로 강조하는 '변호사 없이 재판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무기평등의 원칙에서는 턱없이 미흡한 것이다.
한편, 대법원 사개위에서는 국선변호인의 질적 향상을 위해 '국선변호 전담 변호사 제도'가 논의되고 있다. 국선변호 전담 변호사제도란 '특정 변호사로 하여금 국선변호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고 다른 민·형사 사건의 수임을 금지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동안 지적돼왔던 국선변호의 문제를 보완하고 변론의 질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나'의 범죄를 주장하는 국가의 법률전문가를 상대로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판사를 앞에 둔 '재판'이 아니라 '사법절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누구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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