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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은 특전사를 보내자고 하던데요"" 과외를 가르치던 중, 아이가 말한다.
""민간인을 죽인 거잖아요... 이라크에 있는 테러집단 쓸어버리자고...""
""그 친구들은 그럼 미군이 이라크 민간인들을 계속 죽일 땐 특전사를 보내자는 말 왜 안 했다니?"" 라고 내가 물었다. 아이는 답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막상 그 말을 뱉어놓은 내 자신도, 과연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막막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인 만 여명의 학살,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고문 소식에 피켓을 들고 집회에 나갔지만 그 뿐. 여느 때처럼 다시 일상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 뉴스는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는 가슴 아픈 소식 중의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선일 씨가 피살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던 새벽 무렵부터 사람들은 슬픔과 죄책감으로 술렁거렸다. 학살당한 이라크 시민들에 대한 애도에는 비할 수 없는 거친 분노의 물결은 거리로, 인터넷으로 쏟아져 나왔다.
'만여 명'이라는 생명력 없는 숫자는, 그리고 '이라크'라는 국가의 이름은, 1년 여 동안 학살당한 그들을 '타자'라고 규정했다. 우리가 미국반대, 부시반대, 전쟁반대, 파병반대 등 온통 벌어진 상황만을 반대할 뿐, 적극적으로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아니 넘지 않았던 것은 이라크인에 대한 타자화 된 시선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국 그들에 대한 감정, 의지와 행동은 '우리' 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것이다.
비겁한 테두리를 둘러친 우리는 그들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 명의 그들'에게 일어난 슬픔과 분노, '내 곁의 당신'에게 일어난 슬픔과 분노에는 잔인하고 비겁한 경계지음이 있었다. 결국 이런 우리들이 김선일 씨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생명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생명, 가족의 생명 그리고 내 이웃, 내 나라 국민의 생명과 그 외의 '생명'을 정말 평등하고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던가. 이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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