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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폐지의 열기와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치열하다. 폐지냐, 개정이냐, 존치냐를 두고 정치권에서, 그리고 매스컴에서 연일 다투지만, 이미 대세는 폐지로 기운 듯하다. 존치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고, 개정을 둘러싼 논란은 오히려 존치 대 폐지의 논란보다 더 소란스럽고 결론 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가 헌법재판소의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 7조에 대한 전원 합헌 판결에 의해 상처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사적 결론'은 폐지로 모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제 국가보안법 폐지의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김원기 의원은 17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면서 국회의원들에게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국회가 보여주었던 과오를 극복하고... 제2의 제헌국회의원이라는 각오로 17대 국회를 성공시킬 역사적 소명이 있음""을 호소했다. 국민들의 '선거혁명'을 통해 탄생한 17대 국회가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4·3항쟁의 무고한 희생을 발판 삼아 탄생했던 '단독정부'의 제헌국회와 그 이후에도 오점투성이인 과거 국회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제2의 제헌국회'로 출발하는데서 자신의 좌표를 명시한 것은 옳은 일이다.
그렇다면, '제2의 제헌국회'로서 출발을 상징할 수 있는 최우선 개혁입법과제는 무엇일까. 1948년 12월 1일 제헌국회가 제정한 국가보안법의 폐지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항쟁을 계기로 거듭되는 민중의 저항을 누르고자 졸속으로 국가보안법을 탄생시켰다. 기본법인 형법보다 무려 5년이나 앞서 제정된 국가보안법. 그것은 제헌국회의 역사적 오점이었다.
정권수호를 위해 날림으로 만든 국가보안법은 제정 당시부터 오용과 남용의 논란에 휩싸였다. '공산당을 탄압하고자 만들었으나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만 잡는다는 격으로 정작 3천만 민중도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어 자손만대에 죄를 짓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국가보안법은 말 그대로 '빨갱이 마녀사냥'의 절대적 도구였다. 제정 당시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했던 국회의원들이 제일 먼저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을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희생되었다.
국회가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3년 전시체제하에서 형법을 제정할 당시 국가보안법의 조항들은 형법 조문 안으로 흡수되었고 「부칙」에는 폐지대상 법령으로 국가보안법이 명기되어 있었다. 국회가 거수표결을 했으나, 전란의 와중에서 다수가 의사표시를 꺼리면서 2차례 미결되고 국가보안법은 자동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다. 이후 우리의 어두운 역사가 국가보안법과 운명을 같이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화되어갔다. 또한, 독재정권은 정권위기를 국가안보위기로 호도하며 국가보안법의 개악을 시도할 때마다 국회는 정권의 거수기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개정과 폐지의 호기가 찾아왔을 때는 그만 실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치욕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고는 '제2의 제헌국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반민족·반민주·반민중적인 3반(反)의 '원죄'를 참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김정인 님은 학술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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