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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체가 엄마의 뱃속에서 성장하는 생물학적 과정을 10달간 지켜본 후, 나는 드디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내 아내는 4∼5일 동안 산통을 하고 출산 당일 분만 촉진제까지 맞았으나 끝내 자연분만을 하지 못하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응애, 응애애애... 아이의 울음소리는 아내와 고통을 함께 하려고 진땀을 빼던 나에게 청량제와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다짐했다. 관행처럼 유지돼 온 이 사회의 불합리를 이 아이에게만큼은 강요하지 않겠노라고!
그 첫 번째 실천으로 나는 아이의 이름짓기에서부터 평등의 가치를 녹여내려 했다. 그래서 내 성과 아내의 성을 모두 아이의 이름에 넣고 싶었다. 하지만 국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의 성은 부성'만'을 따라야 한다고 법으로 강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우리 아이가 부계 혈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의 이름 앞에 아내의 성을 붙여 출생신고서의 이름란에 기입하는 편법을 써야 했다.
부부양성을 아이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겪은 또 하나의 어려움은 가족 구성원들의 반발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이름짓는 법은 없다며 펄쩍 뛰셨다. 형제들은 꼭 그렇게 이름을 지어야 하냐며 불만을 표했고, 아버지 또한 끝내 동의를 하지 않으셨다. 처가 식구들도 이 '해괴한' 이름짓기 방식에 낯설어하며 힘이 되어 주지 못했고, 상황이 이쯤 되자 아내는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부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가족들의 반응이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어쩌면 이들은 엄마의 성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보다 엄마의 성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던 것일 게다. 그리고 '이들의 생각 못함'은 부성만을 강제하는 기존의 법과 제도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 이것이 바로 '호주제'인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호주제 폐지를 권고적 당론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제 호주제 폐지가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아버지의 성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부성 강제주의가 현행 호주제의 핵심 중 하나다. 또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정부·여당과 많은 호주제 폐지운동 단체들도 부성 강제주의를 부성 원칙주의 정도로 개선하는 선에서 머물고 있다. 부성을 원칙으로 하되 부부의 합의 아래 모성을 사용할 수도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부계 혈통을 당연시하는 현실에서 아이의 이름에 모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부부성을 함께 쓰고 싶은 나같은 경우에 부성 원칙주의는 결코 대안일 수 없다.
'부모성 함께 쓰기' 선언을 한 지 7년이 지났다. 이제 그 선언에 동의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부부성을 함께 물려주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호주제 폐지와 함께 부부양성 쓰기는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 범용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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