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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일제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처벌하기 위해 제정했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1948년 12월 1일 탄생했다. 당시 일어났던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 졸속적인 입법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공산당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청산대상인 친일파들이 일제의 유제를 부활시킨 탄생해서는 안 될 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폐지가 예정되었던 한시법
국가보안법은 개정 당시 내란상황이 정리되면 없애자는 법무부장관의 제안설명에서 보듯이 시한부 생명을 기약하며 만들어졌다. 그러나 1949년 이 법에 의해 남로당 등의 좌익세력과 한독당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 등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오히려 강화되어 개악되었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체포 구금돼 전국 감옥의 80%를 정치범들이 차지해 감옥과 법원을 증설할 정도였다. 법원과 판사도 부족하다며 1차 개정 때는 아예 단심제로 처리하는 방향으로 법이 개악됐다.
1953년 형법을 제정할 당시 초안을 잡았던 김병로 대법원장은 ""국가보안법은 한시법이고 형법으로 규율할 수 있으므로, 보안법을 폐지하자. 보안법을 폐지하지 않으면서 형법을 제정하면 법률의 중복문제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여당 의원들이 지금까지 폐지 반대론자들이 애용하는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와 이 제안을 부결시켜 애초 한시법이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하면서 더욱 강화된 악법으로 되어버렸다.
추악한 개악의 역사
국가보안법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58년 12월 24일에 있었던 제3차 개정 때였다. 당시 경향, 조선, 동아일보도 모두 이 법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하고, 법률이 개악되었을 때 일제히 ""민주주의는 끝났다""고 비판했다. 그때 '인심혹란죄'가 등장하여 오늘의 7조(찬양·고무)의 원형이 형성됐다. 민심의 극심한 이반 속에서 집권의 연장을 꾀하던 이승만 정권은 무술경관을 시켜 개정 반대 농성을 하던 야당 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여당 의원들만으로 법을 개악했다. 그때 6개조였던 법조문이 40여 개로 늘어났고, 최고형이 사형으로 강화되었다. 이렇게 개악된 국보법은 1960년 민주당 정권에 의해 대부분 되돌려졌지만, 다시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 의해 고스란히 부활되었다. 박정희는 국보법의 5차 개정을 단행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불법기구에서 심지어 반공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내란을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불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에 흡수·통합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1990년 헌법재판소가 7조 5항에 대해 한정합헌 결정을 내린 뒤 국회에서 여당인 민자당(지금의 한나라당)은 개정안을, 야당인 평민당은 대체입법안을 각각 제출했지만 1991년 5월 31일 여당 의원만으로 단 35초만에 날치기 통과됐다. 그 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고, 지구적 차원에서 냉전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남북간에는 남북합의서와 남북정상회담과 공동선언까지 이루어졌지만, 국가보안법은 단 한 글자도 변경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법의 악순환으로 정당성 상실
결국 이런 국가보안법의 개악 과정을 통해 한시법이 유지·강화되었으며, 정부는 비판세력들을 제거, 억압하기 위한 법률적 장치로써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활용해 왔다. 또한 법을 고치는 과정에서 절차적인 정당성, 적법성마저 갖추지 못하였으며, 처벌대상의 행위유형이 매번 확장·강화되고, 독재정권 강화 목적으로 찬양·고무(7조) 조항이 편입되었다.
지금까지 7차례의 개정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은 헌정을 유린한 불법집단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날치기 통과와 개악을 반복해 왔다. 이런 역사를 볼 때 국가보안법이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안전장치라는 폐지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허구임이 쉽게 드러난다.
결국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절차의 정당성과 적법성마저 상실한 국가보안법의 역사는 국가보안법이 완전 폐지되어야만 하는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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