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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추방운동연합 전 대표였던 구기일(66) 씨가 지난 10일 별세했다. 구기일 씨는 90년대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투쟁'을 이끌어오면서 국내 산업재해(산재) 추방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의 사망을 계기로 원진레이온 직업병인정 투쟁의 성과와 국내 산업재해 문제의 현실을 되돌아본다<편집자주>.
◎ 구기일 씨는 누구인가?
고(故) 구기일 씨는 산재추방운동가이기 전에 원진레이온 직업병 환자였다. 환자의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원진노동자직업병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는 등 투쟁의 중심에 서 왔던 구기일 씨는 99년 5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산재 단체 초청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심장이상으로 쓰러졌다. 그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치료요양을 받던 그는 이달초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가 10일 사망했다.
박찬호 원진 녹색병원 사무국장은 ""이황화탄소 환자는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라며 ""투쟁의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던 구 위원장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다 결국 쓰러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 원진레이온 투쟁이란?
19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투쟁'은 우리 사회에서 '직업병'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59년 설립된 인조견사 제조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은폐되었던 이황화탄소(CS2) 중독 직업병 문제가 속속 밝혀지기 시작했고, 이에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후 91년 직업병 환자 김봉환 씨의 사망 이후 1백37일간 진행된 농성투쟁 등을 거치면서, 마침내 원진 노동자들은 '직업병 인정'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 원진레이온 투쟁이 남긴 것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산업의학과 과장은 △수많은 직업병이 밝혀지는 등 산재문제에 대한 의학적 관심과 접근수준이 높아진 것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신설과 산업안전보건법의 개정 등 제도적 개선조치가 이뤄진 것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시설과 연구인력이 갖춰진 원진 녹색병원의 건립 등을 원진레이온 투쟁이 남긴 커다란 성과로 지적한다.
더불어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산업재해를 자신의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 원진레이온 투쟁이 갖는 가장 큰 의의""라고 임 과장은 평가했다. 원진 투쟁을 계기로 노조마다 노동자 건강문제를 전담하는 부서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노동자들이 산업안전보건과 관련된 각종 제도적 장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끊지 못한 꼬리표 '산재왕국'
원진 직업병 투쟁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산재문제에 대한 제도적, 의식적 발전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최상위권에 속하는 '산재왕국'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게 또 한편의 현실이다. 하종강 한울노동연구소장은 ""산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장시간노동과 저임금, 불평등구조에 있다""고 지적한다. ""3년전 ILO(국제노동기구)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주요 36개국 가운데 최장시간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며 ""장시간노동은 노동자들의 주의력을 떨어뜨리고 이는 산업재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나마 지난 10여 년간 통계상 감소되고 있던 산재발생 수치도 IMF 구제금융체제를 거치며 다시 상승했다는 것 또한 하 소장의 지적이다.
한편, 임상혁 과장은 ""우리나라가 산재발생율에서 최상위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직업병의 경우는 일본에 비해 1/10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직업병이 발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직업병을 발견해내는 시스템이 여전히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봐야한다""고 지적했다.
◎ 원진 직업병 환자 실태
올해 57세인 정현산 씨는 지난해 6월 이후 계속 입원요양중이다. 손발이 저리고 뒷골이 어지러우며, 청각과 시각 장애에서부터 협심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증상을 보이고 있는 정 씨는 ""원진 직업병 환자들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40-50대의 이른 나이에 벌써 '노쇠현상'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고 구기일 씨를 비롯해 지금까지 사망한 원진 직업병 환자는 모두 43명. 해마다 환자의 숫자가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올해까지 확인된 환자의 숫자만 해도 8백여 명이 넘는다. 원진레이온에서 근무했던 노동자가 2만여 명에 이른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직업병 환자의 숫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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