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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자는 딸도 없냐? 니 딸도 당해봐라."" 가슴 서늘하게 하는 이 구호는 얼마 전 롯데노조의 투쟁현장에서 여성조합원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 담겨진 문구.
""조선처녀 윤금이가 미군의 손에 죽어간 것을 추모하며 만든 이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뒤이은 노래말... ""♪~ 조선의 치마사이로 들어온 ......♬ ♩~~ "". 그제 있었던 투자협정 WTO반대 국민행동이 주관한 문화제에서 정태춘씨가 한 발언과 노랫말.
""당신의 딸처럼 생각한다면 10대를 성적 대상으로 살 수 있겠소?"" 원조교제, 10대 매매춘을 공격할 때 주로 등장하는 말.
이쯤에서도 필자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들을 모아다 놓은 것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혹시나 그런 분들은 정말 여성인권에 대해 귀닫고 살았던 과거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분노하고 절망감을 맛보는 것은 어디에서도 여성 개인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오직 자본가에게 침탈당한 노동자와 훼손 당한 민족의 자존심으로서의 조선의 처녀가 있을 따름이다. 그들이 당한 문제는 그것이 투쟁의 대상들과의 전선 형성에 유리한 고지를 제공할 때만 받아들여지고 화려하게 포장된다는 점이다. 또한 여성들은 그들의 딸로서만 보호받을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딸'이란 존중받을 개인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제의 소유개념이 작동된 말이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소위 인권을 말하고 진보를 말한 운동 내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한 존엄한 인간이기보다는 적과 아를 구분할 때 그의 처지가 어디인가에 따라 지탄받거나 혹은 보호받는 대상으로 될 뿐이다. 그런데 왜 '개인의 고통'보다 '집단의 수치'가 문제시되는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여성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의 문제로 인식되기보다는 여성이 속한 집단이 당한 명예 훼손 수치로 인식되어 온 것은 여성이 집단의 성원이 아니라 소유물 교환물 재산으로서 간주되어온 가부장제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진보진영과 그 중에서도 인권운동진영 내에서 내재화된 가부장제의식에 대한 뚜렷한 저항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여성들의 인권은 말로만 외쳐지는 공허한 언설이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리말이 생겨난 기념일인 한글날을 보내며 여성의 인권이 우리의 언어 속에도 피어나는 그날이 오길 바래보면 너무 과도한 욕심이 될까?
◎ 정주연 씨는 '운동사회내 가부장성과 권위주의 철폐를 위한 여성활동가모임' 회원이며,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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