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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쫓겨난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 용산참사 10주기를 맞이하며
어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지난 해 5월, 사무실 이사를 했다. 큰 길에서 골목으로 조금 들어오면 사무실이 있고, 그
뒤로는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펼쳐지는 동네였다. 오래 된 주택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는 재개발 구역을 안내하는 낡은 현수막과 재개발조합 사무실 간판이 걸려 있었다. 현수
막과 간판은 오래 되어 보였고, 재개발 사업이 예전에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
문에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사를 마치고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재개발 조합 설명회와 출범을 알리는 새 현수
막이 동네 곳곳에 걸리기 시작했다. '조합 설립 이후에도 수많은 절차가 남아있으니 재개
발 과정은 못해도 몇 년은 걸린다, 지금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한낱 세입자인 나는 재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며 언
제 공사가 시작될지 모른다.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을 조금씩 흔들기 시작한 재개발이 도대
체 언제쯤 거대한 지진이 되어 날 덮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10년 전 용산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쫓겨나는 사람들
2006년, 용산 제 4구역 일대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강제
철거가 시작되었고, 유독 빠르게 진행된 재개발 끝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남았다. 2009
년 1월 20일 도심 한가운데 있는 건물 옥상에 망루가 세워졌고, 단 하루 만에 경찰에 의한
대규모 진압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루는 불길에 휩싸였다.
여섯 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였다.
재개발은 '뉴타운'에서 '도시 재생'으로, 그리고 '도시 재정비'로 그 이름을 바꿔왔다. 낙후
한 지역 시설을 개선한다는 말은 좋지만,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목표가 무색
하게도 가장 먼저 내쳐지는 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 들어 살던 집이 재
개발 구역으로 지정되고, 설마 하는 사이에 공사가 시작된다. 보상금은 이주비용을 감당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당장 집에서는 나가야만 한다. 서울시가 동절기인 12월에서 2
월까지 강제 철거를 금지하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작년 동절기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11월 30일, 고 박준경 님은 아현동에서 강제 철거를 당했고 며칠 뒤
유서를 남긴 채 돌아가셨다.
동료가 최근 박준경 님을 추모하는 집회에 갔다가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는 철거민의 말
에 문득 그 말의 무게를 실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쫓겨났다는 말이 흔해지고, 그만
큼 쫓겨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대규모 재개발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월세값 인상을 감당하지 못해 조금 더 작거나 조금 더 외진 집으로 이사하는 사람들이
내몰려 쫓겨나고 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이 주거 세입자에게 불안함으로, 상가 세입자
에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돌아오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 투기 억제와 가격 안정을 이야기하지만, 부동산을 시장으로만 바라보는 관
점은 변하지 않았기에 실제로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워지고 있다. 땅이나 집을 누
군가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세를 들어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 공간에 대해 어떤 결정권도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소유주가 내 집과 내 땅에서 나가라고 말하면 그대로 쫓겨나버
린다. 갈 곳이 없어 버티던 사람들은 강제 철거를 당하거나, 혹은 망루를 지어 그 위에 오
른다.
맞서는 사람들
10년 전 용산 철거민들은 망루에 올라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쳤다. 그러나 망루가 세워진
지 3시간 만에 경찰이 출동했고, 25시간 만에 유례없이 신속하게 진압을 시도했다. 경찰3/5
1,600명과 경찰특공대 99명, 수대의 물대포 차량이 투입되었다. 이미 불이 한 번 났는데
도 개의치 않고 무리하게 진압할 때 2차 화재가 일어났고, 망루는 전소했다.
10년 전 용산참사는 이후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에서 숱하게 반복된 국가폭력의
서막과도 같았다. 경찰의 폭력은 부당한 해고에 맞서 파업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앞에
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와 밀양 송전탑에 반대한 주민들 앞에서, 2015 민중총궐기에
서 물대포를 맞은 고 백남기 농민과 시민들 앞에서 반복되었다.
하지만 공권력이자 강한 물리력을 지닌 경찰이 오히려 사람들을 내몰고 쫓아낼 때, 망루
를 짓고 올라 재개발에 맞섰듯이 경찰의 폭력에 맞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가 처한 부
당한 현실에 맞서 용산참사 유가족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강정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
였다. 내몰리고 쫓겨나는 모든 사람이 하늘이라고 외치며 SKY 공동행동을 구성했고, 대
한문에 '함께살자 농성촌'을 만들었다. 용산참사 이후 10년은 쫓겨난 사람들이 함께 맞서
온 시간이기도 했다.
경찰은 책임지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 세상도 따라 바뀌었다는 지금, 경찰의 무리한 진압으로 사
람이 죽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2018년 9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
사위원회는 용산참사 당시 경찰이 안전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진압해 인명
사고를 불러온 데 대해 용산 유가족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그 얼마 뒤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용산참사 유가족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백남기 농민 유가족에게 사과의 뜻
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1월 14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용산참사 이후 처음으로 경찰 조직의 변화와 적절한
시기에 사과할 것을 약속했다. 바꿔 말하자면, 용산참사 이후 10년간 경찰은 한 번도 사과
하지 않아왔다. 당시 무리한 진압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2009년 용산
참사의 책임을 지고 서울경찰청장에서 사퇴한 이후에도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
장 등을 거쳐 현재는 국회의원까지 지내고 있다. 작년 경찰에 이어 검찰에서도 내부 과거
사위원회를 통해서 용산참사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지만, 참사 당시 담당검사들의 조사 거
부와 압력으로 인해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 직후 망루를 세운 사람들은 몇 년씩
옥살이를 했지만, 망루를 무너뜨린 경찰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용산참사의 진실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여섯 명을 희생시킨 화재는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이전에 경찰은 왜 무리하게 진압을 강행했는지, 그 이전에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은
어째서 그렇게 빠르게 진행되었는지. 우리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용산참사에 대해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용산참사_그리고_나
진실을 알 때 변화할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다시는 그러지 않는 사회
를 그려나갈 수 있다. 재개발과 경찰 폭력이 어떻게 참사를 일으켰는지 밝혀내지 않은 채
말하는 사과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용산참사 10주기를 기억하고 말하는 이유다.
용산참사 10주기 추모 주간이 '용산참사, 그리고 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추모 행
사의 일환으로 #용산참사_그리고_나 라는 해시태그 아래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은
다. 용산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최근 사무실 주변에 붙은 재개발 현수막에 불안하다. 그리
고 지금 내가 느끼는 불안함을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로 맞닥뜨린 용산참사를 떠올리며,
지난 10년간 사과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은 경찰과 김석기 국회의원에 분노한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그렇게 용산참사를 기억한다.
기억은 곧 행동이다. 기록된 기억은 사회에 공유되고, 공유된 기억은 움직임으로 이어진
다.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을 나눠주기를 바란다.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맞
서주길,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함께 책임을 물어주길 바란다. 누군가 내몰리고
쫓겨나는 일이 당연해진 사회, 불안해서 불행한 사회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용산의 구
호를 함께 나누길 바란다. 그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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