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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나 재판도 세상사처럼 시간의 제약 하에 있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 안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자는 법이 돕지 않는다. 권리 위에 잠든 자는 이제 그 결과도 감수해야 한다. 시효제도는 민사사건에도, 국가배상에도, 형사처벌에도 적용되며,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원칙이란 그 원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공간과 시간에서만 타당하다. 법치국가의 변방에서라면 어김없이 법치국가의 원칙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한 자들을 편드는 악랄한 철칙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악리가 두드러진 사례를 국가범죄(國家犯罪)라 한다. 국가범죄란 실력자들이 권력을 찬탈하거나 유지하기 위하여 대량으로 또는 조직적으로 저지른 투옥, 고문, 학살 등 권력범죄를 말한다. 국가범죄는 개인적 차원에서 저질러진 범죄들과는 성격을 달리하므로 시효를 부인하여 책임자를 영원히 처벌해야 하고, 배상책임도 영원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언은 한국의 법률가라면 그저 죽어지내는 독일헌법재판소의 판결이기도 하다. 하필 이런 것은 왜 무시되었을까?
도쿄에서는 성노예 문제로 국제모의법정이 열리고, 해방정국과 한국전쟁에서, 나아가 월남전에서 자행된 민간인학살에 대하여 줄기차게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국회가 배상법을 제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유족회의 일부에서 헌법소송을 제기해 놓았다 한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로부터 인권옹호적인 판결을 과연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나라의 최고재판소인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는 더 갈 것도 없이 가까운 80년초에 저질러진 삼청교육대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에게 한결같이 시효가 지났다고 판결했다. 만약 피해자들이 전노집권기에 범죄자들을 고발하고, 검찰이 그들을 상대로 공소를 제기하였더라면 정의의 보루인 사법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법으로 말이다.
국가범죄는 국가의 원죄이다. 원죄가 원죄인 이유는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한 새로운 악리를 요구하고, 이에 최고사법부가 법률가식의 전문용어로 화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권리 위에 잠들었는가? 역사를 뒤지면 흥미롭게도 해방정국에서 자행된 억울한 학살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대구지역의 유족회원을 5 16군사정부는 진상규명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자 이제 억울함을 사직당국에 고발해서 모진 고초와 죽음을 자초하는 자만이 권리 위에 깨어있는 자란 말인가? 법치국가의 근본원칙을 뭉개버린 악마적인 시대에 권력판결 뒤로 숨던 사법부가 이제 법치국가의 화신으로 표변하여 피해자들을 상대로 '권리 위에 잠든 자'라고 단죄한다면, 그렇다면 사법부에게 묻건대 당신은 그때에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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