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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오전 6시20분경.
창원 두산중공업 사내 노동자 광장 옆에서 한 노동자가 분신했다. 배달호(50세)씨. 그는 81년 한국중공업에 입사 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용접 숙련공으로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노동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전형적인 노동자였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인 두 딸의 아버지였던 배달호 씨는 분신을 결행하기 이틀전인 7일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와 작은 딸을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아빠가 너한테 해 준 게 없어 미안하구나. 우리 딸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엄마 말 잘 듣고 공부 잘해야 한다""
다음날인 8일 저녁 5시경. 여느 때와 달리 일찍 집에 들어온 배달호 씨는 부인에게 45만원이 든 봉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남편이 있으니 좋지""라며 전해준 봉투에는 자신의 글씨로 '배달호 45만원'이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파업 이후 구속과 정직 3개월, 그리고 이어진 사측의 임금, 부동산 가압류 조치 이후 6개월간 단 한푼의 월급도 가져다 주지 못했던 그는 마치 월급 봉투를 가져다 주듯 그렇게 어디에선가 돈을 얻어 부인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일 아침 5시 15분경. 다른 날과 달리 1시간 먼저 회사에 가야한다고 말한 배달호 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그날 아침에도 부인의 볼에 뽀뽀를 한 후 출근했다고 한다. 부인이 남편의 분신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2시간 여가 지난 새벽 7시경이었다.
헐값 매입 후, 막가파식 노조탄압
1월 11일. 밤 11시가 넘어 도착한 창원 두산중공업은 너무나 넓었다. 중공업답게 뭐든지 다 크게 지어진 공장을 본 후 ""도대체 여기 땅은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한 노조 간부는 ""100만평이 넘는다""고 답했다.(정확히는 138만평) 2000년 12월 12일 당시 공기업 중 흑자를 기록하던 자본금 5조원의 한국중공업을 불과 3천57억원이라는 헐값에 사들인 두산그룹이 제일 먼저 나선 것은 노조 무력화를 위한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1200여명의 사원을 내쫓은 후 노사가 함께 합의한 단체협상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가 하면 이에 반발,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 18명을 해고하고 90여명을 징계했다. 그뿐 아니라 61명을 고소고발하고 89명의 노조원에게는 총 65억원의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사측은 이들의 급여 및 부동산을 가압류했고 심지어 아파트 보증금까지 차압했다. 이 같은 사측의 막가파식 민, 형사 소송은 노동자 가족들의 생계를 직접 위협하는 무기였으며 그 결과 극한 상황에 처한 노조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특히 노조측은 2002년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이 '노동조합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상식 밖의 발언 이후 이 같은 조치가 취해졌다며 두산중공업은 노동조합 탄압을 넘어 노조에 대해 완전 백기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산이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여명 정도, 재산 가압류, 급여 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정책,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유서'에서)
사측은 배달호 씨가 마치 임금 및 부동산 가압류 때문에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한 것처럼 보도자료를 통해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가압류 문제에 대해 노조측과 긍정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마당에 너무 성급한 분신을 한 것이라는 말도 공공연히 하고 있다. 그러나 유서에서 보듯 임금 및 부동산 가압류가 배달호 씨 분신 항거에 한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나 마치 배달호 씨의 분신 항거가 모두 이 같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인 것처럼 사측이 주장하는 것은 본질을 훼손하기 위한 의도일 뿐이었다.
""3개월 정직, 해고자 볼 낯없어""
무엇보다 배달호 씨가 분신 항거한 원인은 자신이 노조 교섭위원으로 일하면서도 해고자 18명의 복직에 대해 아무 해결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한 자책감이었다고 한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라고 유서에서 썼듯 실제로 배달호 씨는 아침 7시 회사에 출근하여 제일 먼저 노조 사무실 1층 해고자와 수배자들이 생활하는 방에 들린 후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불쌍한 해고자들 꼭 복직 바란다'는 유서의 말처럼 배달호 씨는 생전 ""나는 정직 3개월을 받아 해고자들을 볼 낯이 없다""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산중공업의 극악한 노조 말살 정책과 가진 자의 횡포에 대해 분개하며 자신이 일하는 보일러 공장 소속 200여명의 노동자를 상대로 노조 운동에 함께 할 것을 열심히 설득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사측의 가압류와 무자비한 징계 앞에서 한껏 위축된 조합원을 보며 배달호 씨는 이미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크게 통탄했다고 한다. 결국 노조가 무너지고 노동자의 권리가 짓밟히는 두산중공업의 현실을 보며 배달호 씨는 자신이 가진 단 하나의 생명을 던져 사측에는 불의에 대한 항거를 표시하고, 노동자에게는 새로운 각성을 촉구한 것이었다.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내가 먼저 평온한 하늘 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다.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 주기 바란다. 나는 항상 우리 민주광장에서 지켜볼 것이다.""(유서에서)
배달호 씨의 죽음은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정책 앞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현실 앞에서 그는 '제2의 전태일'이 되어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바라보겠다는 '민주광장'에서 한 늙은 노동자의 절규가 어찌될 것인지는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고 배달호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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