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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김응수/ 주연:김중기, 김선재
외길에 대한 맹목처럼/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이미 간 길 다간 이의/뒷모습 흔들리는 생 속에서도 나는/찬탄으로 우러렀거니/그러나 확신으로 걸어온 길 꼬리 감추고/나를 버리는 이정표 없는 낯선 마을의 저녁/바람 앞의 잔가지로 나는 불안하다.......
영화가 끝나자 특별한 연관이랄 것도 없이 떠오른 이재무의 시 '누옥'(陋屋)의 일부이다. 아무리 많은 수사를 나열한다 해도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적과 동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기, 싸워야 할 적이 없으면 젊다고도 옳다고도 할 수 없었던 시대, 그래서 적대적이고 불안정했지만 절대에의 신념에 단호하게 복종할 수 있는 에너지가 치솟던 시절, 바로 그 20대의 나이로 80년대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라는 이름으로 스크린 속에 투영되었다. 역사의 혼돈과 격랑 속에서도 간단없이 그리고 가차없이 지속되는 시간은 '그들을 어디에 데려다 놓았는가'.
한때 일직선의 대오를 형성하여 공동의 적과 싸웠던 학우동지들이 그들 이념의 메카였던 모스크바에 모였다. 그들은 동일하게 서른의 문턱에 들어서긴 했지만, 이제 각기 다른 줄에 서 있다. 친구 진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기,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중기의 곁을 안타깝게 맴도는 선재, 외교관으로 제도권에 진입한 성준, 짜증스런 일상과 장관부인의 꿈 사이를 오가는 성준의 아내 경주, 러시안룰렛를 흉내내며 트로츠키를 읽는 기웅, 퇴폐적이고 냉소주의자로 변해버린 은정. 이들이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길게 늘어뜨려져 발목 잡는 과거와 낯선 얼굴을 한 현실에 대한 부적응과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한 미래이다. 한 자리에 모이긴 했지만 대화는 겉돌거나 날카롭게 서로를 찌른다. 결국 밖으로 겨누어졌던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와 상처를 내고서야 각자 뿔뿔이 돌아선다. 권총자살로 자기 생에 종지부를 찍은 기웅 외에는 다시 지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타야만 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현지에서 거의 감독의 혼자 힘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제의 진지함에 비해 기술적인 미숙함이 곳곳에 드러난다. 연기 경험이 없는 유학생들이 연출하는 동작과 표정과 대사는 제각각 흩어지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시나리오와 연출은 개연성이 없어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세련된 카메라 미장센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저 또 하나의 후일담이라는 이름의 어설픈 습작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적 형식미가 부족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해도 이 영화로 인하여 아직도 여전히 젊은 그들을 기억해 내고, 그들의 자리와 더불어 그 당시를 살았던 내 삶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첫발을 내디딘 이들과의 대면을 주선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 김경실 .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영화반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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