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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분단 반세기만의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지난 13-15일. 난 롯데호텔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김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악수로 만났고 헤어질 때 포옹을 했다. 그리고 14일 밤엔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연방제 통일방안 등에 합의했다. '우리 문제는 우리 힘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으론.
그 뒤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 휴전선 양쪽에선 분단 반세기동안 정말 질기게도 이어지던 상호비방방송이 끊겼다. 평양에 갔던 사람들은 '밝힐 순 없지만 놀랄만한 합의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최악의 반민주악법인 국가보안법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적어도 국가보안법 개정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장강의 큰 흐름인 것 같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어떻게 개정될 것인가, 폐지는 불가능한가, 인권운동가들은 이런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 같다. 예상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개정의 방향은 우선 남북교류협력에 장애물이 되는 조항을 손보는 쪽일 것 같다. 인권의 관점보다는 남북관계의 관점이 개정의 주된 접근법일 것 같다는 얘기다. 이것도 엄청난 진전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권의 외침이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에 묻힌다면 이는 불행한 일이다. 인권 운동가들에겐 갈 길이 멀어 보인다. 19일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듯이 남북의 화해와 국가보안법 개폐에 사실상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축으로 한 보수진영을 제어하면서, 우왕좌왕 멈칫거리는 민주당을 견인하면서, 민주적 시민과 민주운동진영의 숙원인 국가보안법 개폐를 여하히 현실화 할 수 있을까.
고백할 게 한가지 있다. 13-15일 롯데호텔에서 일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호텔 앞마당에선 롯데노조가 비정규직원들의 정규직화와 임금인상을 내걸고 파업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얼핏 보건대 대오는 강했다. 그러나 어느 신문도, 어느 방송도-한겨레는 이를 취재했으나 내부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지면에 싣지 못했다-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이 핵폭탄이라면, 롯데노조의 파업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을까. 그냥 묻히고 말아야 했을까.
또 하난 프레스센터에는 내외신 기자가 복작거렸다. 화장실이 당연히 붐빌 수밖에 없었다. 호텔 화장실은 웬만한 수준의 집 안방보다 깨끗하다. 끊임없이 청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롯데호텔 화장실에도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오가니 아예 출입문에 서서 쉼 없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정규직원이 아닌 용역회사 파견노동자였고, 하루 2교대 12시간 노동에 월 6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난 '고맙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할말이 없었다. 요즘은 머리가 너무 아프다. 내 용량으론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제훈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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