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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인권학술회의 2000, 나로서는 이 회의의 전반을 아우르는 평가를 하기가 조금은 곤혹스럽다. 베트남 참전과 관련한 인권문제, 빈곤층 어린이의 인권, 독신모의 모성과 여성성, 에바다 사태의 전개과정과 전망, 인현동 화재사건을 통해 본 청소년의 인권, 가족구성에 관한 여성의 권리 등 인권으로 접근할 수 있는 30여 개의 구체적인 각론들이 섹션으로 촘촘히 짜여져 있어 모든 내용들을 모니터링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병렬식 구성은 인권운동의 방향성에 관해 총론적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다양한 수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침해의 사례들과 그에 대한 운동의 현황에 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더 적절해 보였다. 따라서 회의 첫날, '왜 소수자의 인권인가'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던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대)가 인권과 소수자 권리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보다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 고양'에 역점을 두었다고 강조한 것은 이 학술 회의의 미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이었다.
""가해자의 인권"" = 인권의 감수성?
회의 둘쨋 날,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관한 토론을 저지하겠다며 제주지역 베트남 참전 군인회에서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 한 토론 참석자가 '가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며 ""토론 발제자가 그들을 도발했다""는 식의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인권의 감수성이 가해자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이야 사고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조건 질타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번 회의 참석자 모두에게는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장벽을 뛰어넘어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민중들 간의 연대운동이라는 원칙부터 확인할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다는 반증은 아닐까? 유엔을 중심으로 한 인권운동의 한계나 강대국의 수혜적 혹은 수사(修辭)적 인권정치에 대한 비판은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의 세계화가 초래한 다수의 사회적 배제가 인권 개념의 확장을 그 어느 때보다 강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서 확인했더라면 좀더 질적인 '인권의 감수성'이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현실과 그들의 인권의 문제를 '일상'으로부터 끌어낸 점은 주목할만했다. 특별히 ""선발된"" 100여명의 학자와 활동가들 간의 의식수준의 차이가 예상 외로 커서 사실 좀 선별의 기준에 대해 의아해 했는데, 토론에 참여한 일부 남성 참가자들의 반여성적, 혹은 여성비하적 발언은 이 '일상'의 인권 억압 문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남성 참가자들의 이러한 일상적 반인권 행위나 의식에 내재한 위계문화에 대한 항의성 대자보를 붙이는 '즐거운 반란'이 시작된 것은 둘째 날부터였다.
불붙은 대자보 논쟁
▶...한 남성은 이로 인해(대자보 폭로 때문에) 남성들이 ""불편""하고 ""위축""되었다고 말했다. 여성비하 발언으로 불쾌감(개인에 따라서는 모욕감과 분노)을 느낀 여성의 상처나 기분 보다는 남성들의 감정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노동자나 장애인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해도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타자""로 처리되는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위축감과 소외감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남성들은 단 며칠도 그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가?...
▶...어제 발제자들의 발제가 끝난 후 00대학의 한 교수님께서 일어나서 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OOO씨에게 충고 한 마디 하겠다""(OOO씨는 젊은 여성이었다-인용자 주)로 시작된 교수님의 지적은.... 교수님과 OOO씨는 똑같은 연구자의 입장이다. ...다 같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동료 연구자의 논문 발표 자리에서 ""충고""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다.
▶...대자보에 씌어진 글들에서 힘을 얻어 저도 한자 적어보려 합니다. 25일 학술대회 첫날 기조발제자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였습니다. 저는 간단히 저의 사례를 들어서 답변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질문 내용이 미흡하다라는 한마디와 사회자까지 동승해서 저의 질문을 무참히 매도해버렸습니다...
가볍지 않은 논의를 기대하는 마음
위의 내용은 학술 대회 자리에서 붙여진 대자보의 내용 중 일부이다. 만약 학술대회 기간 동안 내내 맴돌았던 '인권의 감수성'이라는 화두가 여성활동가들의 이러한 거침없는 문제제기로 확인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이번 회의에 대해 다소 격앙된 비판을 가했을지도 모르겠다. 즉석에서 소모임이 꾸려져 이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으니 풀뿌리 민주주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면 좀 과한 것일까?
일급 호텔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며 자원활동가들의 빈틈없는 서비스를 받는 것이 나로서는 다소 곤혹스러웠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너무 경직된 모랄을 가졌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형식은 내용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소박하되 궁하지 않으며 열려있되 가볍지 않은 인권의 논의를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은 건 나만이 아니리라.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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