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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제주인권학술회의'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두고 인권운동가 사이에서 논란이 뜨겁다. <인권하루소식>은 엄혜진 씨의 '제주인권학술회의를 다녀와서'(3월 4일자)를 게재한 데 이어 그에 대한 정영선 씨의 반론(3월 10일자)을 실었으며, 이번에는 다시 정영선 씨 글에 대한 이정주 씨의 반론을 소개한다. 제주에서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길래…? 이정주 씨는 이것을 ""진보적 남성들조차 가부장제의 내면화로 인해 일상에서 쉽게 성차별적 발언을 한다. 이에 대하여 (여성활동가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라고 요약한다. 독자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이 논쟁에 <인권하루소식>이 금쪽같은 지면을 제공하는 까닭은 이 논쟁이 우리 인권운동의 역사에 기록될 가치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편집자 주>
엄혜진님의 기고문에 대한 정영선님의 반론을 읽었다. 우리사회의 ""인권 논의의 참다운 방향""을 위한 치열한 고민과 논쟁들이 생산적으로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허심탄회하게' 정영선님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한다.
첫째, 정영선님은 글에서 ""베트남 참전 한국군의 양민학살을 보고한 당시 발제자의 진실된 의도는 '건너 뛰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의해 상당히 왜곡""됐다고 하면서 '베트남 참전 한국군은 가해자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나는 여기에서 정영선님이 파악한 '발제자의 진실된 의도'가 무엇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내가 이해하기로 구수정 씨의 발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행해진 양민학살에 대해 한국 국민과 정부가 이를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베트남전 당시 양민들에게 총을 들이댄 한국군들은 '자유 수호'라는 명분 아래 국가의 명령을 받아 동원된 피해자들이다. 그러나 베트남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살해한 한국군들은 분명 '가해자'이기도 하다. 정영선님은 왜 이를 부인하려 하는 것일까? 과연 베트남 피해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참전 한국군인들을 가해자인 것처럼 운운하는 것은 언어의 횡포'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나 전후 미군이 저지른 양민학살들에 있어서도 우리는 미군 '그들의 입장'에 수긍해야지 그들을 '가해자 운운'하는 것은 미군 개개인에 대한 '언어의 횡포'가 되는 것인가? 만일 정영선님이 베트남전에서 양민학살에 가담한 한국군에 대해서나, 한국전에서 양민학살에 가담한 미군에 대해서 동일한 논리로 그들을 '가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양민학살을 덮어두고자 하는 것이라면, 제주 인권대회 참석자 중 문경 양민학살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눈물로 호소하며 일이 해결될 때까진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던 채의진님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정영선님이 미군에 의한 학살은 인정하면서 유독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면 정영선님에게 배타적 민족주의나 종족차별의 편견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 성차별, 여성인권 침해 지적
둘째, 정영선님이 제기한 대자보 논쟁에 관한 내용은 다분히 감정적이며 비약적이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가 불분명하다. 추측컨대, 자신은 대자보 논쟁이 즐겁지 않았는데, 엄혜진님이 '즐거운 반란'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진실이 왜곡'됐다고 하는 것일까? 대자보의 내용은 '전체 남성을 싸잡아 폄하해 버리는' 내용이 분명 아니었다. 우리사회의 소위 진보적(민족, 계급문제에 있어) 남성들조차 가부장제의 내면화로 인해 일상에서 쉽게 행하는 성차별적, 여성인권 침해적 발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인권회의 자체의 의미를 실추시킬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는 것일까? 인권회의에 온 사람들이 모두 '완벽'한 사람들로 비쳐야만 인권회의의 의미가 살아나는가? 오히려 이러한 논쟁들이 당위적, 추상적 개념이기 쉬운 인권을 구체적 일상의 세계로 확대시키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정영선님은 여성인권 운동과 페미니즘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남성을 적대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하여 분리하고 차별하는 과정에서 생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억압적인 '정치 제도'이다. 여기에 대항하여 여성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바꾸고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왜 남성들은 자꾸 '공격'으로만, '적대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그리고 '인권회의 전 일정을 경직케 만든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공동 책임이 있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양비론적 입장은 문제의 초점을 흐린다. 어떠한 모순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갈등상황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을 일으킨 당사자보다 문제 해결을 위해 그 문제를 꺼내든 사람을 비난한다면,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엄혜진님이 언급한 즉석 소모임은 '남성 절대 사절'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분명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남성들이 참여해 토론을 풀어나갔다. 정영선님이 얘기한 '남성 절대 사절' 모임은 처음 대자보를 붙였던 사람들끼리의 일종의 대책회의였다. 이점에 대한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번 제주 인권대회에서 문제가 됐던 대자보 논쟁은 바로 일상의 권위 문제를 가시화시켜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었다. 모든 인권 논의는 소수자의 인권부터 시작돼야한다. 인권의 담론 과정 속에서 소수자의 인권이 또다시 소외되고 된다면 인권담론은 천박한 수준의 거대담론일 뿐이다. 일상에서 소수자들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또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우리사회의 인권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정주(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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