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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지요. …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지휘자가 또 다시 확인을 합니다. … 그 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92년 2월 월간 「말」지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기사 중 발췌·인용)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앞에서 옥천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한국군에 의해 7천여 명이 집단학살된 산내 골령골이 나온다. 대전 '산내학살 사건'은 92년 2월 월간 「말」지에 의해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으로 공론화된 후 오랜 기간 또 다시 침묵해야 했다.
이후 99년 12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던 산내학살 관련 자료가 공개되면서 지역사회단체의 진상조사와 유족들의 증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해제된 문건은 '50년 7월초 3일간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8백명이 처형됐다'고 보고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단체들은 △목격자들이 '당시 열흘이 넘게 학살이 진행됐다'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점 △유족들에 의한 제사가 7월 초순부터 중순까지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 △학살현장이 3곳으로 그 규모가 크다는 점 등 진상조사 결과를 토대로 최소 3천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올 4월 발굴된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지의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위닝턴의 증언록은 학살의 규모를 7천명으로 명시했다. 증언록은 학살의 마지막 순간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7월 17일 새벽 남아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 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백명씩 37대 트럭분, 3천7백여 명이 죽었다.""
결국 한국전쟁 발발 직후 6월 27일 대전으로 내려온 한국정부는 '폭동을 일으키고 적을 도울 우려가 있는' 사람에 대해 학살을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 7월초 3일간은 대전형무소 정치범 1천8백여 명이 집중 처형됐으며, 그 외 1천2백여 명이 7월 1일부터 보름에 걸쳐 대대적으로 총살당했다. 또한 금강전선이 무너지고 한국정부가 대구로 이전한 다음날인 7월 17일 새벽에 3천7백여 명이 마지막으로 학살됐다.
산내학살 진상규명 활동 초기부터 결합했던 심규상 씨는 ""정치범보다는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이 학살된 규모가 더 크다""라며, ""골령골은 좌익정치범들에 대한 처형지가 아니라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살육장소였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학살의 기준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모호해졌다""라며, ""나중에는 여성과 10대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리하여 심씨는 골령골을 '죽음의 골짜기' 혹은 '유골밭'이라고 불렀다.
학살지에서의 세 번째 위령제
8일 오전 10시부터 골령골에서는 '대전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유족과 지역사회단체들은 '보름간의 학살 기간 중 8일 가장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됐다'며, 벌써 3년째 같은 날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날은 먼저 '영산 천도대법회'가 열렸다. 범패, 바라춤 등이 이어지면서 1시간 정도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했다.
이후 추도식에서 향토사학자 이규희 씨는 ""후손들이 후손답게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죄가 우리 어깨 위에 있습니다. 송구스러움에 할복자살이라도 해야겠지만, 이 일을 매듭짓고 그때 가서 위로의 말씀과 명예회복 등을 하겠습니다""라며, 집단 학살된 혼령들 앞에서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전유족회 송영길 대표는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무슨 이유로 몇 명이 끌려왔는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인 노력을 촉구합니다. 유족도 인간의 도리를 다 하고 싶습니다""라고 개탄했다.
추도식이 끝날 무렵 유족 및 참석자 4백여 명은 헌화를 하며 죽은 넋을 달랬고, 곧바로 시작된 상여행진의 뒤를 따랐다. 상여는 2차선 도로 좌우로 흩어진 3곳의 학살현장을 모두 돈 후 이날 위령제를 마무리했다. 송 대표에 따르면, 이곳에 2차선 도로를 만들 때 포크레인 기사가 무수히 바뀌었다고 한다. 하도 유골이 나와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지 못했다는 것. 또 전쟁 직후 보따리 장사라도 하기 위해 이 길을 다녀야 했던 주민들은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위령제 이후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장재완 간사는 ""내년에는 통합특별법에 의해 위령사업이 이루어지고 진상조사도 제대로 돼야 한다""라며, 통합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통합특별법은 한국전쟁전후 한반도 전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골자로 현재 국회 행정자치위에 상정되어 있다.
<편집자주> 최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유족 증언과 진상규명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에 인권하루소식은 일주일에 한번 비정기적으로 전국에 걸쳐있는 민간인학살 현장을 방문해 학살의 진상과 규명운동의 현황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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