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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는데 동네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때가 새벽 3시였는데 얼른 뛰어가 보니 이미 집은 다 타고 연기만 자욱했어요. 기가 막혀서 눈물도 안나오고 근처 학교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날 다시 가봤는데 흔적도 없이 다 타고 재만 남았더군요. 그제서야 실감이 나고 속이 터져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소례(60세)씨의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 위로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렸다. “애들 넷 키우면서 독하게 살아왔는데, 그날 생각만하면 눈물이 나네요. 바보같이….”
지난 1월 19일, 서울 송파구 화훼마을 비닐하우스촌에서 불이 났다. 117가구의 보금자리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민 373명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불이 난 후 구청 차원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원은 3일만에 중단됐다. 주민들은 궁여지책으로 마을회관 옆에 천막을 쳐서 잠자리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막막하기만 하다.
화훼마을에 정착한지 올해로 14년이 된다는 이소례 씨 역시 이번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다. 남편은 28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자식 넷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품앗이로 한두 푼 모아 음식점을 시작했지만 동업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게 됐다.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결국 보따리 몇 개를 들고 찾아든 곳이 가락동.
갈 곳 없어 정착한 화훼마을
“판자집에 얹혀 한두 달 살았을까. 철거를 한다며 나가라고 하더군요. 아무 말도 못하고 짐을 싸 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어요. 갈 곳이 없어 주변만 맴돌고 있는데 얼마가지 앉아 비닐하우스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비닐하우스에 짐을 풀었어요.” 이 씨는 그렇게 화훼마을과 인연을 맺었다. 연탄재로 메운 구덩이 위에 지은 비닐하우스라서 바닥에 합판이라도 깔아야했지만 합판 살 돈마저 없던 그는 12월 혹한의 맨땅 위에 옷 몇 개 깔고 한달 동안을 지냈다. 밀가루 한 봉지, 연탄 두 장을 외상으로 사다가 수제비 장사를 시작했지만 한 그릇도 못 파는 날이 더 많았고, 그때마다 라면 한 개로 다섯 식구가 한 끼를 때워야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나마 몇 푼 벌어 쌀밥을 했는데 밥이 빨갛더라고요. 나중에야 물이 썩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이 마르니 그 물이라도 먹고살아야지 어떻게 해요. 애들은 매일 배가 아프다고 울었어요. 전입신고마저 되지 않아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해놓다보니 애들 학교는 멀고, 먹는 것도, 물도 시원찮은데 먼 등교길에 시달리기까지 해서, 애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학교에서 돌아오곤 했어요. 하루에도 열두번 씩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갈 곳이 없었어요.” 첫째 딸만 빼고 나머지 자식들은 중학교만 마쳤다. 화훼마을 사람들이 투기꾼이 아니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씨는 평생 방 2개 짜리 집에서, 석유 보일러가 놓인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지난 14년 동안 여기서 세금 내라는 것 다 내고 살았어요. 선거 때만 되면 구청장,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찾아오더니, 이제 오고 갈 곳도 없어 도움을 달라고 하는데 쳐다보지도 않아요. 사실 주민등록을 옮겨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살던 집만 원상복구 시켜주면 되는데, 거지같은 집이라도 기어들어 갈 곳만 있으면 좋겠는데….” 비정하다고 이 씨는 말했다. 없는 사람들은 제 살이라도 나누어주며 살지만 힘있는 사람들은 등돌리며 사는 세상이라고 이 씨는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알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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