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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시죠. 제네바의 3월은 저희 인권운동가에게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세계인권총회’라고 불리는 유엔 인권위원회가 올해에도 이번 3월 22일부터 4월 30일까지 6주간 이곳 제네바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현재 일하고 있는 가톨릭 인권단체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도 페루,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인도, 잠비아, 콩고 등 여러 나라에서 이번 회기에 참석할 약 10여명의 인권운동가를 초청하고 이번 회기 중 발표할 발언문을 손질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소식(3월 19일, 제네바소식 참조)에서 이미 보도했듯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인권위원회에서 수많은 인권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이번 회기에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처음으로 직접 참석해 연설할 예정이고,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도 한국정부를 대표해서 처음으로 연설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세계인권선언 50주년 직후에 처음으로 열리는 회의인 만큼 기대가 높고 시기적으로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헤라르디 주교
이번 달 내내 여러 인권관련 회의에 참석하면서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인권희생자와 운동가를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과테말라에서 온 마리오 리오스몬트 주교와의 만남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주교님은 S선배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작년 4월 준군사조직에 의해 살해당한 헤라르디 주교의 후임으로 현재 과테말라의 인권위원회를 대표해 이번에 제네바를 처음으로 방문하셨습니다.
로메로 대주교에 관한 영화를 통해서 엘살바도르의 80년대 인권현실이, 지난 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리고베르타 멘추 여사를 통해 과테말라의 원주민 인권현실이 국내에 어느 정도 소개되었지만 아직 중미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헤라르디 주교님은 이곳 인권위원회에 잘 알려진 인권운동가였습니다. 그 분은 최근 수년간 저희 단체의 초청으로 인권위원회에 참석하여 과테말라의 인권상황에 대해 발언하고 국제적 연대와 지원을 호소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약 2년 간의 조사작업을 토대로 ‘이제는 그만(Never Again)’이라는 종합적인 과테말라 인권보고서를 작성, 작년 4월 공식적으로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교님은 이 보고서의 내용과 결론에 분개한 군부의 사주를 받은 집단에 의해 발표 다음 날 숙소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 회기 중 하루를 정해 모든 인권운동가들은 가슴에 그분의 초상을 담은 스티커를 부착함으로써 그분을 기억하고 침묵으로 항의를 표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주교님의 후임자인 몬트 주교님은, 제가 신변의 안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자, “저는 주교라 설사 살해를 당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기도해주는 사람도 많아 천국에 ‘곧장’ 가겠지만, 정작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납치, 실종, 살해되는 ‘보통의 이름 없는’ 인권활동가들이다”며 평화로운 미소를 지으시면서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십자가의 진리는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며 “자신 또한 헤라르디 주교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담담하게 소감을 말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주교님의 동생은 현재 과테말라 군부의 핵심 지도자로 지난 80년대에 군부 쿠데타의 주동자라고 합니다.
이 분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저는 국내의 대다수 인권활동가가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처, 그리고 지금의 부끄러운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문민’에서 ‘국민’정부까지 왔건만, 아직도 정의는 둘째치고 진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인권운동가의 의문사 사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헤라르디 또는 몬트 주교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이 문제로 겪는 고통이 한층 줄어들 텐데….
십자가의 행진
제가 이분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신문에서 또 다른 인권운동가의 의로운 죽음을 보았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저명한 여성 인권변호사인 로즈메리 넬슨 씨가 폭탄테러에 의해 인권운동가에서 순교자이자 열사가 된 것입니다. 헤라르디 주교와 넬슨 변호사의 죽음은 둘 다 평화협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과거를 무조건 덮어둔 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화해’가 아니라 ‘진실과 정의’에 기반한 평화를 온 몸으로 실천하다가 의로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행진이 전 세계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인 작년에 유엔 인권위원회와 총회는 ‘인권운동가 보호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인권위원회에서 인권운동단체들은 선언의 후속작업으로 인권운동가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을 강력히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한참 늦었지만, 국내의 수많은 열사들, 그리고 두 분의 희생에 대한 자그마한 위로이자 보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성훈(팍스로마나 사무총장)
팍스 로마나는 1921년 스위스에서 국제 가톨릭 대학생의 연합체로 탄생, 현재는 전 세계 약 40여 개 국에 회원단체를 가지고 있는 국제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단체다. 현재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으며 유엔에 협의자격을 가지고 유엔인권위원회 등 인권관련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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