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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육해공군을 동원해 라 모네다 대통령궁을 초토화시킨다. 피노체트의 공격 대상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 아옌데 대통령은 피노체트의 망명 제안도 거부하고 민중연합정부의 최후를 위해 무장했지만 칠레의 '평등한 세상'을 완성시키고 못한 채 끝내 죽음을 맞는다.
이후 피노체트의 폭압적 군정 17년이 시작된다. 피노체트는 아옌데 정권말기 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지 19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 그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콘도르 작전'이란 이름으로 좌익소탕작전을 실시했다.
3,197명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고 1,102명이 실종되었으며, 고문불구자 10만명, 국외추방자 100만명이라는 사실은 그의 통치가 바로 살육이었음을 보여준다. 피노체트는 1998년 말까지 군총사령관직을 맡아 독재의 영속을 기도하기도 했다.
<칠레전투>는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가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기 전 아홉달 동안 촬영된, 흔들리는 칠레의 모든 기억을 담아놓은 역사적인 다큐멘터리다. 1970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의회민주주의를 기반해 칠레에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한다.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칠레의 젖줄인 구리광산, 은행 등 국가기간산업을 국유화시킨다. 이에 대한 기득권층과 미국의 역공으로 칠레는 기득권층과 민중, 좌파와 우파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빠져든다.
어떤 제작 경험도 없던 감독 파트리시오 구즈만과 그의 동료 5명은 16미리 카메라 한 대와 구식 녹음기, 코닥 필름 42,000피트와 자연조명으로 무장하고 혁명과 반혁명의 치열한 공방전을 누비며 날 것 그대로의 칠레 역사를 채록했다. 카메라는 역사의 현장을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려는 듯 '롱테이크' 기법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민중연합정부에 대한 가없는 애정을 드러내는 가장 설득력있는 표현이 되고 만다.
촬영된 필름은 민중연합정부가 막을 내린 뒤 6개월의 밀반출 끝에 쿠바로 옮겨진다. 그곳에서 3년 동안 편집되어 칸느 영화제를 통해 <칠레전투>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구즈만과 그의 동료들은 아옌데와 함께 일한 셈이었고, 그의 개혁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의 최후를 기록했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칠레를 떠났다. 이후 카메라맨 호르헤 뮬러 실바는 실종되었고 구즈만은 망명객으로 국외를 떠돈다.
민정이 실시된 1998년 구즈만은 처음으로 칠레에서 <칠레전투>를 상영하게 된다. 20여년 동안 35개국을 에돌아 칠레에 귀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칠레,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칠레전투>의 에필로그인 셈인 이 영화는 민중연합정부에 대한 정치적 기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쿠데타를 경험하지 못했으며 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청년들에겐 지울 수 없는 '역사 체험'이 되었다.
제1부 부르주아지 봉기
1973년 3월 총선에서 아옌데의 민중연합은 우파 야당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승리를 장담했던 우파 기득권층은 총선이후 아옌데 정권을 더욱 노골적으로 공격한다. 민중연합 정권의 3월 총선과정과 의회의 보이콧 전개, 학생소요, 구리광산 파업, 6월 쿠데타의 서장을 다루고 있다.
제2부 쿠데타
6월 쿠데타부터 11월 라 모네다 대통령궁의 폭격까지를 담았다. 아옌데를 살해하고 TV방송을 통해 자신의 집권을 알리는 피노체트의 발표와 연결된 아옌데의 마지막 라디오 메시지는 정의로운 역사의 부활을 알리는 간절한 염원.
제3부 민중의 힘
3부는 아옌데 정권 말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한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리포트이다. 민중들은 이러한 개혁을 발판으로 삼아 자생적 사회주의를 실험한다. 그러나 정치불안과 더불어 기득권층과 미국의 반혁명 공세가 혁명을 강하게 죄어옴에 따라 칠레 민중들의 자생적 사회주의 실험은 마지막 참호의 외로운 싸움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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