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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면 5 18 광주민중항쟁이 19주년을 맞는다. '폭도들의 반란'이 '민중항쟁'으로 재규정되고, 학살의 수괴들에 대한 사법처리도 이뤄지는 등 5 18의 진실과 의미를 복원하는 작업은 그동안 많은 진전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5 18 문제는 다 끝났다""는 시각이 팽배해지고 기념과 축하행사 일색의 5 18로 변모하는 듯한 흐름은 깊은 우려를 낳게 한다. 5 18과 관련해 풀려야 할 과제가 아직도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인권하루소식>은 5 18과 관련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앞으로 4회에 걸쳐 짚어볼 예정이다.<편집자주>
◆ 5. 18 - 5. 27 사망자 166명
◆ 5. 27 이후 현재까지 부상 고문 후유증 등에 의한 사망자 162명
◆ 행방불명자 64명
◆ 부상자 2656명
◆ 구속기소자 357명
◆ 단순 연행 구금자 6백여 명
이상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5 18 관련 희생자들의 숫자다. 이들에 대해 정부는 지난 90년 이후 세 차례(93년, 98년)에 걸쳐 금전적 보상을 실시했다. 아직 자신 또는 가족의 피해를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외하곤 5 18 희생자에 대한 물질적 보상조치가 거의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나,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억 단위를 넘어서는 금전 보상만으로 희생자들에 대한 피해구제 및 복원조치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거듭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악몽은 계속되고…
19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80년 5월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고문피해자들이다.
5 18 당시 군 부대와 수사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던 사람은 줄잡아 2천여 명(신고되지 않은 단순 연행자 포함)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조사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했으며,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떠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황창옥(42) 씨는 벌써 7년이 넘게 정신과 치료약을 복용하고 있다. 80년 5월 27일 귀가하던 길에 연행됐다는 황 씨는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으며 곤봉과 군화발 등으로 '개 패듯이' 얻어맞았다고 한다.
심지어 물 속에 처박히거나, 자신을 개미집에 묶어둔 채 개미집을 건드려 살을 깨물게 하는 지독한 고문도 당했다. 그때의 고문과 구타로 인해 황 씨는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후유증을 줄곧 앓아 왔던 것이다. 황 씨의 누나 순애 씨는 ""동생이 잠자다 말고 느닷없이 일어나 머리와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는 일이 잦고, 특히 5월이 돌아오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씨는 심지어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에서 사람을 때리고 기물을 부수는 행동을 하곤 해 벌써 여러 차례 감옥신세도 졌다고 한다. 93년 9천여 만원의 보상금을 탔지만, 병원비다 뭐다 해서 이미 다 써버렸고, 누님의 도움으로 근근히 생활을 유지해 가는 것이 지금 황 씨의 모습이다.
정신이상 후유증 적잖아
5 18 기념재단의 정수만 상임이사는 ""당시 붙잡혀간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머리를 많이 얻어맞아 정신이상 증세나 간질증세를 보이고 있다""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피해자가 1백여 명이 넘고 그 가운데 사망한 사람만도 21명으로 집계되고 있다""고 밝혔다.
허연식 기념재단 기획부장도 ""5 18 이후 사망한 사람 중 60% 이상은 고문에 의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였던 사람""이라고 밝혔다. 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 외에도 지금까지 '몰핀'을 투여받으며 고통을 참고 있는 중상해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 5 18 관련자들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 허연식 기획부장은 ""고문피해자들은 해마다 그날이 되면 똑같은 고통을 체험한다. 이는 일시적인 금전적 보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심리적 차원의 치유가 뒤따라야 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부상에 따른 경제능력의 상실, 5 18이 왜곡되어 오면서 황폐화된 정서와 정체성의 상실, 피해의식 등을 치유 해소하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프로그램이 뒷받침되어야만 희생자 개개인의 '복원'도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학살자와 5공 세력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니는 모습 속에서 5 18 희생자들은 또다시 혼돈을 겪고 있다고 허 부장은 지적했다.
구천을 떠도는 행방불명자
고문피해자들 말고도 5 18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행방불명자의 가족들이다.
지금까지 정부에 의해 행방불명자로 공식 인정된 사람은 64명. 그러나 아직도 1백명 이상의 행방불명자 가족들이 자식 또는 형제의 억울한 원혼을 달래지 못하고 있다.
80년 5월 딸(최봉예 당시 18세 직장인)을 잃었지만,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지 못한 최규환(67 농업 전북 고창) 씨. 그는 딸의 행방불명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법원에 소송까지 내봤지만 소용이 없자 이제 ""다른 자식들이 있다는 것을 위안 삼고 딸 문제를 포기""하기로 했다. 최 씨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까지 유골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다""고 전했다.
최 씨와 달리 아들(이창현, 당시 7세)의 행방불명 사실을 인정받은 이귀복('행방불명자 가족회' 회장) 씨에게도 안타까움은 마찬가지다.
이귀복 씨는 ""유가족들은 뼈라도 찾았지만, 행방불명자 가족들은 자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는 점이 제일 가슴아프다""고 말한다.
행방불명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이들이 암매장된 장소를 찾아내 유골을 발굴해내는 것이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암매장 장소로 제보된 곳만도 9군데에 달하지만 아직 발굴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고, 그 때문에 의혹만 더욱 무성해지고 있다. 이귀복 씨는 ""경기도의 한 시립공동묘지에 시신을 모아 매장했다""는 의혹을 소개했다.
그러나 시립공동묘지에 매장되어 있던 5백여 구의 시신은 이미 화장되어 버려 그 진실을 확인하기도 힘들게 됐다고 한다. 이제 가족들은 누군가가 나서 행방불명자들의 진상을 말해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정수만 상임이사는 ""물질적 보상과 학살자들에 대한 사법처리 등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5 18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미온적으로 끝나버리고 특히 행방불명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5 18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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