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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번에 우리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한낱 '대책'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인권변호사의 귀감이 된 조영래 변호사. 그는 88년 1월 「관계기관대책회의 정체를 밝혀라」라는 동아일보 기고문 에서 위와 같이 주장했다. 조 변호사의 지적대로 당시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에 깊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철저히 분쇄할 수 있던 절호의 기회였다.
5공 시절 각종 공안 시국사건과 관련, 막강한 위력을 떨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박정희 사망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즉각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만든데서 기인한다. 물론 이전엔 62년 창설된 중앙정보부가 공안탄압을 주도했다. 계엄시 안기부를 확대 강화한 전두환은 이후 계엄합수부를 '관계기관대책회의'로 전환했다.
5공 시절 공안 정치공작 사건발생 시 '어둠 속에 묻힌 절대적인 존재'로 지목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87년 박종철 열사 사망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현 한나라당 의원)이 중심이 된 관계기관대책회의는 이 사건의 은폐를 결정했다고 한다. 안기부가 전국적 파장을 고려해 사실 은폐를 기도한 것이다. 때문에 '턱 치니 억하고 숨졌다'는 희대의 발표가 나왔다.
여론의 집중 질타를 받은 이 '괴물'은 노태우 정권 때인 89년 '공안합동수사본부'로 다시 태어난다.
3월 20일 노대통령은 공약사항인 중간평가를 무기한 연기하고 3월 22일 긴급 공안관계장관회의를 소집, 이른바 '좌익폭력세력 척결'을 이유로 검찰에 상설대책기구의 설치를 지시했다.
공안합수부는 곧 △공공시설 습격 방화 때 무기사용 △전국 지 파출소에 M16 지급 △정당 교회 학원을 막론한 성역없는 공권력 투입 등 계엄상태에나 해당할 초강경 조처를 발표했다.
연이은 파업 등을 탄압하고 중간평가 유보에 대한 국민적 비난여론을 강압적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이어 공안합동수사본부는 89년 광주 청옥동 저수지에서 발견된 조선대생 이철규 씨의 사인을 철저히 은폐했다. 또한 91년에는 고 김기설 씨의 분신을 강기훈 씨의 유서 대필로 조작해 6월 항쟁 이후 가장 거센 국민적 저항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처럼 '관계기관대책회의'나 '공안합동수사본부'는 안기부를 정점으로 '공안탄압'을 기획함으로써 정권유지에 복무했다.
문제는 이런 공안기구의 전통이 '문민정부'를 넘어 '국민의 정부'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변호사의 지적처럼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없애지 못한 '업보'를 우리 국민은 지금도 톡톡히 맛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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