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
"민주화운동관련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이우정)가 91년 ‘5월 정국’에서 희대의 ‘유서대필 사건’을 불러온 김기설(당시 전민련 사회부장) 씨의 ‘분신자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했다. 이것은 강기훈(당시 전민련 총무부장) 씨가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판결이 법정 밖에서 도전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유서대필 사건‘ 규명요구가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당시 노태우정권은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인해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상태였다. 박승희 열사를 시작으로 정권에 항거하는 분신은 계속됐고, 이 와중에 김 씨도 분신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검찰은 김 씨가 남긴 유서가 동료 강 씨에 의해 대신 씌어졌다는 의혹을 제기해 김 씨의 죽음은 물론 민주화운동 전반의 도덕성에 타격을 가하고, 끓어오르던 투쟁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어 국면의 전환을 꾀했다.
검찰은 논고문에서 “유서를 작성하여 줌으로써, … 분신자살의 결심과 결행을 용이하게 도와준 것은 바로 자살방조행위”라며, “(유서대필 행위가) 목적을 위해서는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서의 피고인의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라고 매도했다. 법원도 검찰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91년 12월 20일 자살방조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유서대필 사건’이 당시 정권의 위기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국가기관에 의해 조작됐다는 의혹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공판 도중 변호인 측은 유서필체가 강 씨의 것이 아니라는 다양한 증거자료를 제출했으나,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필적감정 결과만 인정됐다. 김 실장이 92년 2월 17일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그의 감정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검찰은 김 씨 부모에게 확보한 필적자료 중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는 제출하지 않은 점이 밝혀져 변론재개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검찰 측 ‘증거자료’는 인정된 반면 김 씨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자료’는 심리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또 당시 검찰주장에 유리한 조서를 작성한 홍 모 씨는 93년 10월 11일 “90시간에 가까운 강압수사와 ‘협조하지 않으면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강신욱 검사의 협박에 못 이겨 검찰의도대로 조서를 작성했다”고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 씨를 변론했던 이석태 변호사는 민주화보상위의 결정에 대해 “김 씨 분신이 강 씨에 의해 유도된 죽음이 아니라 본인의지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위한 마지막 방안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이 인정된 것”이라며 환영을 했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이은경 사무처장은 “‘유서대필’ 문제가 해결돼야 김 씨의 명예회복이 완전히 이뤄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민주화보상위 조명우 지원과장은 “별다른 이견 없이 김 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면서 “‘유서대필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조 과장은 “결정을 내린 후에 검찰 등에서 항의를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유서대필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재심을 거쳐야 한다”고 지적하고, “이번 결정으로 재심이 가능할 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또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법적인 절차말고도 사회여론을 환기시켜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