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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읽다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대목에 이르러 나는 가슴을 친다.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분개하지 못하고, 설렁탕집 주인에게, 그리고 야경꾼에게만 분개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김수영 시인을 보면서 나는 더 부끄럽다. 그런데 나는 '큰 일에만 분개하였음'이 부끄럽다. 노동자들의 삶을 뒤흔드는 신자유주의에 분노하고, 이라크를 침공하겠다는 미국에 분노하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탄압에 분노하지만, 그렇게 비판해야 할 '큰 일'을 지탱하고 확산하는 '작은 일'에 나는 얼마나 무감한가.
힘들게 내 속의 작은 일들을 꺼내본다. 나는 집안이 어렵고 그래서 약간은 거친 아이들이 내 아들과 친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으며, 힘의 논리로 아들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실력만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함께 일하는 동지들을 독촉하기도 했으며 공중전화를 걸다 그 부스에 기대고 있는 이주노동자를 보고 지레 놀라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개인적 친분을 이용하여 줄 서있는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병원진료를 받기도 했다.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면서, 그렇게 나는 저들의 큰일을 공고하게 하는 작은 일을 끝없이 반복해왔다. 그러면서 나는 큰일에 분개한다. 내가 바로 그 분노해야 할 큰 일을 지탱하는 일상이었음을 잊은 채.
이러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대학 다닐 때 아침마다 정문 앞에서 가방을 뒤지는 전경들 앞에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가방을 내밀고 빨리 이 귀찮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군부독재를 지탱하는 작은 힘인 검문검색에 길들여졌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화장실 가는 길을 막고 서있는 전경들에게 화를 내며 몸싸움을 하는 비정규직 동지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이야기할 줄도 알게 되고, 동지들의 힘에 기대기보다 적당한 수준의 타협을 하는 사람들에게 '노련하다'는 칭찬을 할 줄도 알게 되고, 비정규직을 조직할 때도 적당한 수와 적당한 파급력이 있는 곳에 먼저 신경을 써야 한다고 머리를 굴릴 줄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비겁하다.
내가 큰 일에 분노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일상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내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의 모순들이 곧 내 안에 그대로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그런데 큰 일에 분노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것을 담지하고 있는 내 일상에 분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 일상에 분노하는 것은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하고, 자본주의의 경쟁논리와 모순에 길들여진 내 육체와 정신을 끝없이 채찍질해야 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나를 끊임없이 피곤하게 만들어야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내 안의 작은 분노를 깨워 일으키고, 내 일상에서부터 그 분노를 채워 변화시켜보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큰 일에 분노할 수 없으며, 그 분노로 세상을 바꾸자고 감히 말할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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