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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옳은 말이 힘을 지니고 주장되기 위하여는 그 말을 떠받쳐 주고 그 말의 옳음을 실감케 하는 육체적 근거가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엔가 ‘실재’해야 한다. 나는 이 시대에 옳은 말은 무성하되 옳음을 위하여 기꺼이 핍박받으려는 ‘몸’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스스로 철저히 핍박받는 몸이 되지 못하고 있음이 이 시대를 사는 이 인권운동가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이 시대 인권운동가의 부끄러움
얼마 전, 어쩌다가 명지대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게 되었다. 길에 전경들이 쫘악 깔려 있던 것은 ‘고 강경대 열사 6주기’ 때문이었다. 전경들이 정류장 양방향에서 오는 모든 사람을 모조리 검문하고 있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면서 사람을 불러 세우고 손바닥도 제대로 펴지 않고 잠깐 손을 올렸다 얼른 내리는 경례라는 게 자못 싸가지 없고 위압적이다. 가방을 뒤지는 손놀림이 “지극히 당연”이라는 듯이 자연스럽다. 무스로 머리카락을 빳빳하게 세운 젊은이가 학생증을 제시한다. 유심히 그 학생증은 뜯어보던 전경은 고개 갸우뚱거리면서 그것을 상관에게 갖다 보이고 상관 역시 열심히 뜯어본다(짜식들 진작 전자주민카드라도 만들었으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있으나마나 ‘경찰관직무집행법’
<경찰관직무집행법> 3조에는 불심검문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이 있다. 우선 “경찰관은 …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 … 를 정지시켜 질문할 수 있”고 그 때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하면서 소속과 성명을 밝히고 그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여야” 한다. 경찰관은 “질문하기 위하여 … 경찰관서에 동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당해인은 경찰관의 동행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노동절 집회가 있던 날에도 또 최근에는 서총련이 출범식을 갖던 날에도 서울은 온통 검문천지였다. 물론 경찰의 이런 검문은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불법인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양처럼 온순하다. 경찰관에게보다도 학생들에게 더 화가 난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분노라도 있었다. 빽 소리라도 한번 질러 보고 경찰서로 끌려가는 것이 그리도 겁나는가?
신문에 가끔 ‘과잉검문 말썽’ 따위 기사가 나는 수가 있고 무슨 무슨 인권보고서에는 단골 메뉴로 불심검문문제가 언급되지만 경찰은 끄떡도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모두 주민등록증 제시를 거부하고 경찰에 끌려가는 일을 끈질기게 되풀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이런 상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준법과 ‘옳은 주장’
불심검문 같은 불법적인 관행들뿐만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군사정권 시대에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법’이 거미줄처럼 우리를 옭아매는 세상에서 ‘준법’을 하면서 살고 있다. ‘준법’을 하면서 그 법이 악법이라고,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성한 토론회, 공청회, 서명운동, ‘선언’, 원고 집필….
그러나 원래 악법이라는 것은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서 검토된 끝에 필요하면 폐지”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악법의 본질은 적대적 세력의 제거를 겨냥한 정치권력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악법 개폐운동은 부도덕한 정치권력에 대한 무장해제운동이자 부분적 혁명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말’로써 혁명을 한 예를 본 일이 있는가? 이런 단순한 이치를 요즘 우리는 (세련된 운동을 위하여)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가야하는 이유
‘국가보안법 어기기 운동’의 대학생과 일부 종교인들, 자신의 노래에 대한 검열을 거부하고 수난을 겪으면서 계속 ‘불법 음반’을 냈던 정태춘 씨, 출국금지에서 오는 정신적 중압을 무릅쓰고 보안관찰법에 불복종한 문규현 신부, 아니 누구보다도 (비록 왜곡된 개정이라고는 하나) 오늘날의 노동법을 있게 한 수많은 노동자와 노동운동가의 비참에서 수많은 동성동본 혼인자들의 비참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옳은 주장’에 혼과 힘을 불어넣은 ‘육체적 근거’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을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집회와 시위, 컴퓨터통신에 대한 검열, 영화 비디오에 대한 검열, 감옥의 처우, 사상 전향, 민방위훈련 그리고 앞으로는 전자주민카드문제에 이르기까지.
악법의 거미줄 속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차피 작은 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감옥에 가는 일 만큼 크고 중요한 일도 드물다는 ‘70년대, 80년대 식의 낡은’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감옥에 가자. 친구랑 함께, 애인이랑 함께, 한번도 아니고 두번도 세 번도 열 번도. 드디어 악법의 씨가 마를 때까지!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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