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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다. 사실을 사실이라 하는 것만큼 당연한 일도 없을 듯하나 사실이 사실로 판정나서는 안 되는 일이 많다 보면 사실을 사실로 말하는 것 자체가 모험이 된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특별검사를 임명하여 진상을 파헤친다며 나서고 있는 검찰의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 과정을 지켜보면서부터다. 검찰이 조폐공사의 파업을 고의로 유도했다는 건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노사간 갈등이 생기면 공안세력이 대책회의를 갖곤 했다는 것이나, 탄압의 빌미로 삼기 위해 일부러 불법을 유도하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라는 것도 대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길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육하원칙을 따라야 하는 사실 구성의 형식적 요건 때문에 사실임을 알면서도 사실로 확증할 수가 없는 일이 허다했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가 공개된 것은 진형구 전 검찰 공안부장 때문이다. 그가 낮술 몇 잔에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삼아 말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뻔한 사실을 사실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특검제 도입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뻔한 사실도 연루자의 실수가 나와야만 사실로 확인되고 있으니 사실을 알리는 일은 늘 힘이 든다.
이번에도 어렵사리 특별검사제 도입까지는 이뤄냈지만 강원일 특별검사가 현직 검사를 수사팀에 끌어들이고 검찰 공안부를 수사 대상에서 제외하면서 일이 꼬이고 있다. 특별검사보 몇 명이 해임되고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는 진상 규명을 위한 제도 도입과 관계없이 사실을 막는 사회적 장치와 세력이 계속 준동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우리사회는 자신의 정체, 진실을 밝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과거 반민족 행위를 숨겨야만 하는 친일파, 정경 유착을 은폐해야 하는 정치인과 자본가 등 사실을 숨기고 왜곡해야 권력과 이익을 얻는 세력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사실로 말할 수 없는 사회는 진보를 기대할 수 없다. 인간적 삶의 여유는 해석의 여지와 자유에서 나온다. 동일한 사물을 보고서도 다른 입장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다양한 삶의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의 가능성은 사실의 확보에서 비롯된다.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해석의 자유가 성립할 수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것은 해석의 자유와 인간적 삶의 확보를 위함이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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