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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동독의 첩보기관 남용의 구조와 기제 및 이 첩보기관에 대항한 투쟁에 대해 보고하고 이러한 과거를 청산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통일독일의 노력에 대해 보고한다.
구동독의 MfS는 Ministerium f r Staatssicherheit의 약자로 국가안전부를 말하고, Stasi는 Staatssicherheit의 약자로 비밀경찰을 말하는데 이는 MfS의 후신으로 업무가 확장된 것이다. 1950년 2월 8일자 법률에 의해 MfS에게, 동독의 내·외적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첩보수단과 방법을 가진 통일적인 정보수집기관 및 방어기관으로서의 임무가 주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슈타지에게 첩보권한 말고도 경찰-집행권한 역시 주어졌다. 슈타지는 소위 동독의 인민경찰이 가진 모든 권한을 갖게 되었다. 슈타지는 형사소송법에 의해 경찰과 검찰이 가지는 조사권을 행사하고, 수사, 체포구금, 신문을 하였다.
슈타지의 전임부역자들의 수효는 70-80년대에 급격히 증가하였다 : 72년부터 89년까지 그 수효는 거의 곱으로 늘어 거의 10만명에 육박하였다(주민은 약 1천6백만명). 결국 슈타지와 그 부역자들에 의한 희생자들 말고도, 자신의 가족조차도 감시의 눈초리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던 사람들도 엄청난 숫자였다. 1천6백만명 중 5백만명이 슈타지 중앙컴퓨터에 입력되었다.
■""슈타지""와 ""헌법보호청"" 차이점
슈타지는, 89-90년 해체되고 90년 독일이 통일된 이후, 모든 악을 그 속에 담고있는 악마의 화신으로 전락했으나, 그에 반해 서독의 첩보기관들은, 슈타지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고 법치국가적으로 조직된 자선단체인 것처럼, 대조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동독의 슈타지와 서독의 첩보기관 특히 국내첩보기관인 ""헌법보호청""을 동일한 차원에 놓을 수는 없다. 그것들은 상이하게 조직·형성되었다. 서로 상이한 국가형태, 권력자, 사회체계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슈타지는 하나의 정당첩보기관 즉 통일사회당(SED)의 ""방패이자 칼""이었다. 서독의 정부첩보기관은 그때 그때의 다수당정부에 복무하는 기관인 것이다 슈타지는 대내적 첩보기관의 기능을 주민감시, 스파이방어로 통일시켰고, 대외적 첩보기능은 외국에 대한 정보탐지 및 스파이행위로 통일시켰다. 슈타지는 첩보기관이자 동시에 비밀경찰이었다. 서독시절과 통일이후의 지금에 있어서는 첩보기능과 경찰기능의 분리원칙이 있다.
동독과 서독의 첩보기관의 대내적 핵심기능은 동일하다: 각각의 국가와 사회경제적 현상태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그것이다. 슈타지는 하나의 뚜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 속의 국가'이고자 하는 것이다. 슈타지는 실제 거의 통제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슈타지가 통일사회당의 당 첩보기관으로서, 실제 통일사회당과 슈타지가 서로 얽혀있었고 통일사회당의 지시에 따라 슈타지가 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슈타지의 해체(1989/90)
89년 가을, 지속적인 대중시위로 인해 동독에서 정치적 변화가 생겼다. 저항가들은 MfS와 슈타지의 해체를 요구하며 압박을 가했다. 이 압제적인 기관에 대한 수년에 걸친 분노가, 제도해체, 슈타지부역자들을 쓸모있는 일자리(생산직)에 배치시킬 것, 책임자처벌 등의 요구로 이어졌다. 새로운 동독정부는 이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그때까지의 MfS를 소위 ""국가안정청""으로 바꾸려고 했다. 이에 주민들은 새로운 저항으로 나섰다. MfS의 대부분의 군분실(Kreisdienststelle)은 시위자들에 의해 점거되었고, 금고문이 파괴되었고, 그 서류들은 소위 ""슈타지해체를 위한 시민위원회""에 의해 보관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가안정청""은 뒷걸음질치고 총국간부들은 해고되었다. 89년 12월에 그것 역시 해체되었다. 국가, 정당, 교회, 시민운동의 대표자들로 새롭게 구성된 원탁회의가 안보작업팀을 구성하여 그것의 해체를 통제하고 계속 추진하였다. 그 후 슈타지자료들에 대한 정사 및 평가작업이 시작되었다. 시민위원회는 국가가 구성한 1백80명의 해체위원회로 대체되었다.
■슈타지 과거사 규명
슈타지의 희생자들은 행위자의 석명요구, 슈타지를 진압하는 과정 조사, 손해배상에 밀접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동독인들은 격렬히 투쟁하였다. 동독이 서독에 편입된 후,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성취했다.
국제적이고 여러 학제들로 채워진 기소그룹들은 동독체제의 역사, 성과, 잘못된 전개에 대해 다양한 수단으로 차별화하고 개인적 책임에 따라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책임과 속죄 및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동독의 권위적인 국가보호시스템과 억압시스템의 구조와 작업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특히 지배적 국가이데올로기와 안전개념에 대한 통일사회당의 정치적 책임을 고려하여, 동독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정신사회적 메카니즘을 탐구해야 한다.
롤프 괴스너(변호사, 브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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