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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96년 봄이었을 거다. 봄 대동제를 매개로 ‘휘청거리는 대학사회’를 취재하려 했다. 85년 대학에 들어가 단 30초도 버티지 못한 거리시위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경험한 나로선, 90년대 학생운동이 어딘지 미덥지 않았다. 그 ‘미덥지 못함’을 찾아 비판적으로 기사를 쓰려한 것이다. 그때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 대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지식인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어찌보면 초보적이고, 달리 보면 무척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기자로서 본분에 벗어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난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을 만나 ‘취재 반, 토론 반’하는 식으로 ‘미덥지 못함’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나가려 했다. 많은 학생회 간부들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신화’에 주눅들어있었고, 그때 거리를 누비고 공장으로 숨어들었던 ‘선배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한 총학생회 간부의 ‘절규’는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우리에겐 따라 배워야 할 선배가 없어요. 80년대 선배들은 자기는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60년대나 70년대 민주투사로 싸우다 변절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설프고 미덥지 않아 보이는 건,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때 난 절반은 인정하고, 절반은 부정했다.
99년 겨울 들머리, 그 후배의 지적은 100%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타당한 것 같다. ‘386세대’란 말이 무슨 유명상품 브랜드처럼 온갖 곳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그들은 썩어문드러진 제도정치권을 개혁할 ‘젊은 피’로, 또 사회 구석구석에서 권위주의와 비효율에 맞서 ‘진지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또 능력있는’ 개혁의 투사로 언론매체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심지어 민주화운동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한 보수일간지에서조차 ‘386세대’ 장기 연재물을 실었고, 또 다른 일간지는 ‘386칼럼’이라는 걸 지면에 싣고 있다.
‘386’=‘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닌 30대’. 이런 식이라면 나도 ‘386세대’다. 그러나 나는 ‘386’이고 싶지 않다. 이 자리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못다닌 30대는 그럼 뭐냐’는 식으로 사회적 배제가 짙게 밴 ‘386’이라는 조어법의 ‘반인권적’ 뿌리를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그 말에는 고단했던 군사독재 시절 온몸을 던졌던 젊은이들의 끈끈한 동지애와 분노, 열정 따위가 담겨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언젠가부터 잊을만하면 한번씩 소위 ‘386세대’의 새로운 모임이 결성됐다는 각종 안내장이 날아든다. 어떤 모임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회원이 돼 있다. 삐딱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임이 내건 거창한 명분에서 나는 제도정치권에 진입하려는 ‘야망’을 본다. 탓할 일만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저 몹시 우울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이제 ‘386세대’란 말은 그만 쓰자. 가슴이 아프다.
이제훈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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