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요약>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 2주제: 냉전체제 폭력과 동아시아 여성(일본)
내용
"◎ 제국주의와 성폭력
-후지메 유키(대판외국어대 교수)

미군에 의한 일본여성 강간 사건은 점령 직후부터 빈발한다. 점령 1개월 동안 전국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최소 3천5백명을 넘고 있다. 그러나 연합국총사령부는 점령 초기부터 신문 라디오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통해서 미군병사의 일본여성 성폭력 사건에 대한 보도는 점령목적에 위반한다고 하여 금지하였다.

52년 4월 점령해제 이후, 그때까지 고소가 금지되었던 미군병사의 성범죄 사건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일안보조약에 바탕을 둔 행정협정에서는 미군범죄에 대하여 미국측이 전속재판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국 송환으로 유야무야되거나, 체포되었으면서도 미 군법정에서 간단히 무죄가 되는 등 피해자측은 피해를 호소해도 결국에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53년 10월 협정이 일부 개정되어 공무집행중이 아닌 범죄에 대한 재판권은 일본측으로 넘어왔지만 미군측으로부터 수사를 저지당하거나 일본 검찰 스스로 대미관계에 신경을 써서 기소하려 하지 않는 등, 가해자를 심판하고 죄를 묻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미군은 또 압도적인 물질력으로 식민지 점령지의 여자들을 굴복시켜 ‘매춘’하는 일이 관행이었다. 당시 미군이 중시한 것은 성병에 의한 군대의 전력 저하이며, 그 대책이 여자들에 대한 관리 즉, 강제 성병검진의 제도화다. 

미군은 일본에 진주한 각 부대가 동경에 도착하면 곧바로 동경 내의 사창지역을 시찰하고 그 가운데 4개소에 미군의 성병예방을 위한 세정소독소를 설치했다. 연합국총사령부는 9월 하순, 동경도 위생국에 대하여 동경도 내의 사창가에 대한 설명과 여성의 알선을 요구하는 한편, 점령군 병사가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동경도의 책임 하에 여성의 검진을 엄격하게 실시하도록 명령하여, 그 결과 1개월 후에는 매춘을 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는 여성에 대한 강제검진을 합법화하는 성병예방 규칙이 제정된다. 그리고 11월에는 이것이 전국화한다. 점령 2-3개월 사이에 매춘전문점이나 캬바레, 댄스홀, 맥주홀 등 점령군에게 여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전국 각지에서 지방청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매춘이 일상화된 미군병사들 사이에서 성병은 만연했고, 이에 따라 46년 1월 ‘폐창령’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폐창령에 따라 창기단속 규칙 등은 폐기되었지만, 공권력에 의한 관리매춘제도의 폐기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공창제도가 철폐되기는커녕, 전후에는 미군용의 새로운 공창지구마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해방자라는 미군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일본여성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조직적 성폭력 피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제검거(가리꼬미)에 의한 강제 성병검진, 강제치료는 그것 자체가 잔인한 성폭력이었다. 미군과 그 지시를 받은 일본정부 지방청은 미군병사를 성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거리에서 여성을 다짜고짜 납치해 강제적인 검진을 실시했던 것이다. 이 폭력을 합법화한 것이 앞서 언급한 성병 예방법이다. 매춘을 한다고 의심하는 것만으로 폭력적인 연행이 자행되었고, 검진하는 자리에서 다수의 일반 장병이 ‘성병교육’이라 사칭하며 여성을 세워놓고 구경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제검진의 충격과 치욕으로 자살자들이 발생했고, 강제검진에서 받은 타격은 피해여성으로 하여금 자포자기하도록 만들어 ‘신세를 망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6년 매춘방지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일본 공창제도의 긴 역사는 여성에게 매춘을 시키고 관리 이용해온 쪽이 아니라 매춘을 하고 있는 여성 쪽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녀들은 일본의 국가와 사회에서 버려진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여자의 치명적인 오점으로 보는 성도덕, 미군에 의한 피해고소 금지, ‘전락’한 피해 여성을 이용하면서 병원균 또는 범죄자로 취급한 미일권력자의 협동, 피해자측에 죄와 벌을 전가하면서 공창제도에 종지부를 찍은 매춘방지법의 제정,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의 태도 등. 모든 것이 이 시대 성폭력 피해자의 체험을 피해자 쪽에서 말하고 고발하는 일을 터부시하고 피해자의 존엄회복을 불가능하게 해 왔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체험에 대해 오늘날까지 침묵해 온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압력이 그녀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결과였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과 인권 
-다께시다 사에코(오키나와대 강사)

95년 9월 오키나와에서 세 명의 미군에 의한 소녀 강간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발생 일주일 전쯤, 미군이 오키나와 여성의 머리와 얼굴을 해머로 때려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 오키나와 사람들은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범죄가 너무 많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소녀 강간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한 여대생은 “지금까지 나는 여자가 노여움을 표현하는 것은 상스럽다, 억제해야만 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오늘 여자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들을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밝혔다. 오키나와의 여성들이 소녀 강간사건을 통해 개인의 감정이나 의지, 그 존엄성이 무시되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 ‘평화’에 대한 희구는 한층 강화되었다. 

국가폭력을 포함해 모든 폭력 문제 및 평화 문제는 결국 현실을 살고 있는 개개의 사람들이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권리가 보장되느냐 마느냐의 기본적인 인권 문제다."
문서정보
문서번호 hc00005335
생산일자 1998-08-26
생산처 인권하루소식
생산자
유형 도서간행물
형태 정기간행물
분류1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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