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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서준식 선생을 대신해 차병직 변호사께서<인권시평>을 당분간 맡아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라며, 차 변호사님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편집자주>
서준식은 지금 부재중이다. 그가 일정한 시간에 있어야 할 장소에 없다는 말이다. 아침이면 일어나 사랑방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에 따라 누구를 만나든지 강연을 하고,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집으로 돌아가 혜승이 공부도 봐주고 혜수와 장난도 쳐야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그토록 애착을 갖고 있는 인권하루소식 1000호 발행 기념식장에서도 볼 수 없었고, 인권영화제 지방상영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놈의 인권칼럼('인권'칼럼이 없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도 그의 순서인데, 할 수 없이 꿩대신 닭격으로 내가 맡았다. 특히 간첩사건 발표에 이어 공안기관에서 교수들의 저서와 논문에 이미 시비를 걸었고 학위논문들에 대한 전반적인 사상검증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한데, 그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그가 구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그렇긴 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레드 헌트>라는 연화 때문에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있어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다른 곳에 가서 그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인 인권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자는 처음에는 경찰과 대공분실 수사관들이었고, 지금은 담당검사와 검찰주사다. 일정에 따라 판사들이 그 다음 순서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한가로운 말장난이 아니다. 인권을 평생의 화두로 삼고자 작정한 그에게, 적어도 인권을 침해해서는 아니 될 수사종사자들과 인권을 보장해야 할 법관들이 자의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형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장시간 할애하여 출장교육을 자처한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오히려 인권운동가로서 기쁨이다. 이 기회를 통하여 무엇이 문제인지를 지적하여 교정을 시도함으로써 하나로도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라며, 석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밖의 사람들에게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숨은 뜻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의 첫 번째 교육은 압수수색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 11월 4일 경찰은 영장을 발부받아 그를 체포하였다. 혐의사실은 이적표현물 <레드헌트>와 관련한 국가보안법위반 등이다. 등이라고 하는 것은 나머지 혐의 자체가 그야말로 하찮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체포직후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소속수사관들이 사랑방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였고, 끝날 즈음인 오후 6시부터는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 있었다. 그가 없는 사이 수사관들은 책, 수첩, 녹음테이프, 세미나자료 등을 다량 거두어 갔다.
형사소송절차에서 강제처분의 하나인 압수는 범행에 대한 증거방법으로 의미 있는 물건을 강제로 가져가는 것이다. 따라서 압수 대상은 피의사실과 관련이 있는 물건에 한정된다.
그럼에도 수사관들은 피의사실에 대한 증거로서의 개연성이 없는 물건까지 이것 저것 들고 갔다. 그는 우선 그 점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구술시험을 실시했다. 수사관의 답변은 ""흙 속에 진주가 있다""는 것이었다. 명쾌하나 낙제점에 해당하는 답안이다. 과문한 나로서도 조개 속이면 몰라도 땅을 파면 진주가 나온다는 말은 처음이다. 그들은 개인의 가치와 권리를 <흙>으로, 그들의 기준에 맞는 반민주질서의 상징을 <진주>로 표현한 것이리라.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할 때 피의자에게는 당연히 참여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체포하여 연행한 후 그가 없는 틈을 이용하였다. 일몰시간 후의 야간 집행은 영장에 특별한 기재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그러한 내용이 있었으면 다행이지만 없었다면 그것도 위반이다.
또한 압수수색은 압수로 밝히려는 범죄혐의와 압수에 의해 침해되는 다른 이익 사이의 균형을 요건으로 한다. 따라서 사적인 메모에 해당하는 전화번호수첩에 대한 압수도 위법이다. 그 근거는 사생활의 비밀과 인격의 자유발현권에 관한 헌법의 규정이다. 나의 소유지분이 절반인 사적인 녹음테이프도 거기에 포함되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럼에도 수사는 영장의 피의사실과 관계없는 것들에만 집중되고 있어 그는 진술을 거부하였다. 묵비권을 행사함으로써 위법한 압수와 불법한 수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언제쯤 기약 없는 출장교육을 마치고 돌아 올 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없는 사이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비록 가진 돈은 없지만 함께 상을 하나 제정하면 어떨까. 매년 연말이면 10대 가수상이니 연기대상이니 또는 베스트드레서에 워스트드레서를 뽑기도 하는데, 금년 최고의 법관과 최악의 법관을 선정하고자 제의하고 싶다.
한해는 이미 저물어 가고 그는 없으니, 우선 혼자서 수상자를 결정한 다음 그의 추인을 얻을까 한다. 최고의 법관은 서울지법의 홍중표 판사다. 이장희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였기 때문보다는 실질심사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법관은 구속의 전제적 요건인 범죄혐의의 상당성에 대한 의심도 없이 피의자에 대한 사전심문을 생략한 채 서준식을 구속한 서부지원 최정열 판사의 몫이다.
최고의 법관에게는 <흙>으로 만든, 최악의 법관에게는 <진주>로 만든 트로피를 전해주자.
차병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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