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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5년 6월 2일 오전 8시경 전남 광주에 있는 한 다방에서 정체불명의 남자 10여 명에 의해 국가안전기획부 광주분실로 연행되었다가 다시 서울에 있는 남산분실로 옮겨졌다.
남산 안기부 지하 1층 137호로 끌려갔는데, 취조실로 들어가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힌 뒤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몰래 혼자 잡혀 왔으니까 협조하지 않으면 죽여서 버려도 아무 문제없다. 많은 놈들이 여기서 죽어나갔어도 아무일 없었다. 자! 봐라. 이 벽에 배인 핏자국이 여기 온 놈들이 고문받고 남긴 자국이다. 순순히 불어""라며 거침없이 협박했다.
내가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자 잠시후 다른 안기부 수사관 3명이 들어와 그중 2명이 몽둥이로 온 몸을 무차별 구타하기 시작했다. 얼굴, 머리, 가슴, 등, 팔다리 등 온몸을 몽둥이로 내리쳤다. 2시간의 집단구타를 당한 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입고 있던 군복이 피로 적셔졌다. 그후에는 구타의 감각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모른채 잡혀왔다는 극심한 공포와 계속된 폭행, 기합, 협박으로 인해 '이들이 나를 능히 죽이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 15일경 갑자기 국군보안사 소속 수사관이 합동수사를 한다며 함께 수사하기 시작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합동조사에 참여하고부터 나와 관련된 피의사실이 더욱 과장되었다. 고등학교 후배와의 만남은 학생운동을 사주하기 위한 것으로, 후배와 농담으로 오고 간 모든 얘기들이 시위 예비음모로 조작되어 버렸다. 구타와 협박, 기합으로 피폐해진 심신은 저항할 기력조차 상실하였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한 것을 수백장의 자술서로 작성케하여 세뇌시켰다. 쉴새없이 자술서 작성을 강요하며 자신들의 요구대로 쓰지 않으면 다시 구타가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이 되풀이되자 그들이 강요했던 허위사실이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다.
연행 후 한달이 넘어서 남산근처의 모 호텔에서 큰 형님과 30분간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면회하는 곳에 먼저 대기한 안기부 수사관 3명이 도청장치를 하고, 동석·감시하여 가족에게 아무런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고문과 불법구금에 의한 허위자백 외에는 간첩행위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물증도 없었기 때문에 안기부는 송치 조금전에 기자회견을 종용하여 약 5분 정도의 기자회견용 조작사건 개요를 적어주며 몇번이고 반복케 하여 2층에 마련된 기자회견실로 데려갔다. 그 회견이 끝나자 수사관을 향해 한 기자가 ""너무나 부족하다. 이 정도로 국민들이 속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후에 같은 수법으로 서울구치소에서 두 번 더 기자회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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