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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경 할머니는 29년 2월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거의 외가에서 생활하였다. 할머니가 요시노 국민학교(현재 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담임선생이 가정 방문하여 정신대에 나갈 것을 강요하였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당시 15세, 고등과 1학년)는 44년 6월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로 옮긴 후 다시 도야마현 후지코시로 이동하였다. 배고픔과 고된 노동에 견디지 못한 할머니는 2번의 탈출을 시도한다. 두 번째 탈출을 시도하던 밤 트럭에 탄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야산으로 끌려가 순결을 빼앗긴다. 그 길로 할머니는 ‘하루에’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다미 한장 반 정도 되는 크기의 방에는 하루에 10명의 군인이 찾아왔으며, 주말이면 더욱 많은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그래서 토요일이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자신의 처량한 생활을 군가에 붙여 노랫말을 붙여 부르곤 하였다.
“아아 산 넘어 산을 넘어/멀리 만리를 정신대로/상등명에게 잡혀/내 몸은 찢겨졌다”
해방 후 조선사람의 도움으로 고국에 돌아왔으나 그때는 임신한 몸이었다. 46년 1월 아기를 낳고 집으로 찾아갔으나 어머니에게 쫓겨난다. 그 후 부산에서 아기를 고아원에 맡기고 일을 다녔는데 어느 날 아기가 폐렴에 걸려 죽고 그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그 후 많은 일을 하며 살았지만 만신창이가 된 몸은 항상 아팠고 자궁내막염과 나팔관 이상 등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번 돈을 모두 써 버리고 만다.
92년 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한 뒤, 92년 말부터 국내외에서 증언 집회 등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쳤다. 94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시절의 아픔과 일본정부에게 일본군 위안부 범죄의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그림들은 95년 제4차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가지게 되었다.
강할머니는 95년초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곧 돌아가실 것이라 모두들 예상했지만 1년동안의 투병생활을 훌륭히 해내셨다. 이 기간에도 할머니는 수요시위에 참가했고 각 방송사의 인터뷰 등을 통해 많은 후손들에게 끝까지 올바른 역사를 가르쳤고 끝까지 일본 정부에게 책임자 처벌과 법적 사죄, 배상을 요구하는 강인함을 보였다.
김혜원(정대협 사료관 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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