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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맛을 잃었다고 한다. 살맛을 잃었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인권의 처참한 유린이다. 왜 무엇이 이 지경까지 몰고 왔는가?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민주주의를 사회체제의 덕목으로 누릴 만한 정도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도적들이 분탕질한 역사
우리의 짧은 정치사는 몇몇 큰 도적들이 한탕씩 해먹은 분탕질의 역사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노태우의 민자당, 김영삼의 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1인1당 독재의 분위기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이승만의 자유민주국가, 박정희의 경제부흥,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 노태우의 보통사람, 김영삼의 문민정부 등 이른바 각 정권이 내건 상징적 구호들이 국민들을 얼마나 많이 우롱했는가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 정권이 물러났을 때 항상 그 구호와 반대의 사실들이 들춰졌다. 좀 속도가 빨라진 것이 한보사건이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할 수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더 지능적으로 면죄부를 주기 위한 쇼를 하고 있다. 한푼도 받은 적이 없는 김영삼과 한푼도 준 적이 없는 정태수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국민의 뻥뚫린 가슴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파렴치한들이다.
사필귀정의 참 의미
국민들이 피땀 흘려 한푼 두푼 저축한 돈을 몽땅 받아먹고도 시치미를 떼고 오히려 뻔뻔스런 태도를 보여준 정태수의 청문회 증언모습은 우리를 너무도 슬프게 한다. 청문회를 통해 무엇을 밝혀낼 수 있을까? 청문회를 해봤다는 자위의식에 사로잡힐 국회의원들의 작태도 우리를 분노케 한다.
좀 크게 넓게 보아야 한다. 대통령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지금의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의 판단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 어디에 있으며 대통령이 책임지지 않을 일이 어디에 있는가?
굳이 청문회나 짜맞추기 검찰수사를 통해 국민을 속이려 하지 말아라. 사필귀정이다. 퇴임 후가 걱정되어 지금부터 이른바 수작을 부리고 있으나 이젠 믿지 않고 속지도 않는다.
5. 18특별법, 노동관계법 진통에서 보여주듯 김영삼 정부의 기본시각은 군부독재정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양심수가 한 명도 없다는 정부발표와 국가보안법위반 구속자의 엄청난 증가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흐르고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검찰수사가 곤두박질치고 대통령의 결단에 국회가 삐에로로 전락하는 나라에 삼권분립이 웬말이고 민주주의가 어울리기나 한 것인가? 오죽하면 현재 대통령의 권한은 조선왕조시대의 왕의 권한보다 더 막강하다는 탄식이 나올까? 더욱 치욕스러운 것은 대통령의 아들이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것이다. 대명천지 민주세상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의 아들도 무슨 벼슬이고 직책인가 국가경영을 가족경영쯤으로나 생각한 모양이다. 그 주변에서 서성거린 권력해바라기 무리들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이념적 가치를 생각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사리사욕만이 보였고 그들의 머리 속에는 분탕질할 프로그램만 들어 있었다.
고양이에게 맡긴 생선을 아쉬워하는 문민정부를 지지한 국민들도 한심스럽다. 3당 야합에서 이미 알았어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야 소용없다. 지금은 다음을 준비 할 때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또다시 지역감정, 파당의식, 학연, 혈연으로 혼탁해진 대통령선거를 치르면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지금보다 국민은 더 힘들고 어려워진다. 또다시 매 사안마다 종묘공원 탑골공원 명동성당 등에서 집회를 해야 하고 거리행진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일도 이제 신물이 난다.
역사를 두려워할줄 아는 대통령
이제 안해도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편에서 역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심부름을 하겠다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임기동안에 예전에 살던 집을 새로 고쳐 짓는 일조차도 삼갈 수 있는 대통령, 하루를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오 할 수 있는 총리나 장관, 나라돈이란 것이 결국 국민의 세금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국고가 누수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직업공무원, 뇌물 특혜 등으로 얼룩지지 않는 재벌이 필요하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체념해서는 안된다. 선거혁명을 통해서 이룩할 수 있다.
살맛 나는 세상은 누가 가져다주거나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투쟁하여 쟁취하여야 할 인권이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우리가 누려야 할 절대적 가치이다. 그저 살려져 가는 목숨연장은 사는 것이 아니다. 평등 세상에 계층과 차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사회에 지도자는 필요할지 몰라도 통치자는 필요 없다. 지도자는 심부름을 자처하지만 통치자는 지배와 군림을 앞세운다. 언론은 용어 사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전제 군주정시대에 쓰던 용어를 무책임하게 남용하여 국민을 퇴영적으로 쇠뇌 시켜서는 안된다. 이 또한 인권유린의 한 전형이다. 살맛 나지 않는 세상이라고 탄식만 할것이 아니라 살맛 나는 세상을 이룩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정치인을 믿을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김동한 (법과 인권연구소 소장,광주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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