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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제작하고 있는 인권영화가 곧 완성된다고 세간의 관심이 많다. 박광수 감독 등 6명의 기성 감독들이 '차별'과 관련된 10분 가량의 단편을 각각 1편씩 만드는 연작이라고 한다. 인권위는 2002년 가을 제작을 공표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인 인권영화가 제작된 적이 없었다""고 단언하고 이 영화가 ""국내 최초의 인권영화""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어이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지난 96년 이후 지금까지 모두 37편의 국내 인권영화가 인권영화제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었고(여러 가지 사정상 소개되지 못한 작품도 다수 있다), 작품을 만든 감독들은 37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지난 수년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인권영화 만들기라는 '천직'을 떠나본 적이 없다. 북송 장기수를 담은 김동원 감독의 <송환> 등 이들이 올해 쏟아낼 작품도 한두 편이 아니다. 푸른영상이나 노동자뉴스제작단처럼 십 수년 동안 묵묵히 소외되고 차별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비교적 잘 알려진) 독립프로덕션뿐 아니라 그런 울타리도 없이 연출자 혼자서 카메라 하나에 의지한 채 제작에 혼신을 쏟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이다. 이들이야말로 '본격적인 인권영화'를 만들어 온 장본인이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들 누구에게도 '본격적인 인권영화' 제작을 제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의 존재를 몰랐을까? '몰랐다'면 누가 들어도 궁색하고 게으른 변명이다. 의도적인 배제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35mm 영화감독으로 제작 진용을 짠 것을 보면 그들이 어떤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극장 개봉용 영화만이 '본격적인 인권 영화'의 완성태가 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인 무지를 드러내며 인권영화가 극장으로 진입하기 힘든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권위의 어리석음 또한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그 결과 비주류 독립영화를 홀대하는 꼴이 되어 '차별'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겠다던 인권위 스스로가 '문화적 차별'을 저지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묵묵히 인권영화를 만들어왔던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짓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언론이 보인 관심 중에 하나는 초저예산으로 제작한다는 점이다. 총 제작비는 3억이며 편 당 할당 된 제작비는 5천만원이라고 한다. 모두 '개미처럼 허리를 졸라매야 했고 심지어는 사비까지 보태 만든다'고 보도된 바 있다. 5천만원이 적은 예산인가? 대표적인 독립영화 지원 기금인 영화진흥위원회의 단편독립영화 지원은 최대 2천만원이며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운영하는 CGV 기금도 여러 편을 5천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하고 있다. 가난만이 예술의 모태
가 된다고 역설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충분한 제작비가 반드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기본 조건도 아니다. 다만 국내 영화 제작 현실을 볼 때 결코 적지 않은 제작비라는 것이다. 이는 인권영화를 만들어 왔던 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앞서 말한 기금조차 많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하지 않다. 다른 기금이란 전무한 실정이다. 완성된 후 상영과 배급수익이 제작비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제작비와 생계 해결하기 위해 예식장 비디오 찍기 등 갖가지의 부업을 전전하기 일쑤이다. 푸른영상은 최저생계비도 되지 않는 액수로 활동비를 책정해 두었지만 이것도 1년에 '몇 번'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한다. 이들은 바로 신빈곤계층인 것이다. 인권위 프로젝트에 참여한 감독들은 몇 달 '좋은 일' 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인권위마저도 홀대하는 '인권영화감독'들은 평생 빈곤과 싸우며 제작현장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김정아 씨는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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