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논평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에 부쳐
내용
"지난 22일자 논평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논평>의 본래 취지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된 질타와 비판, 또는 우리에 대한 단순한 인식공격적 비난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평> 발표를 계기로 '붉은 악마' 현상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소중한 장이 마련된 점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애초 논평에서 표명된 저희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지면상의 한계로 논평에서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논거들을 보강하여 제시함과 아울러, 이번 논평의 내용에 대해 여러 분들이 제기하신 비판과 질의에 답함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토론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비판 대상은 거리응원을 즐기는 시민들이 아닙니다

축구 사랑이라는 개인적 취향으로 모인 동호인 조직으로서의 '붉은 악마', 그리고 그저 한판 걸판지게 놀아보기 위해 거리응원에 나선 시민들이 <논평>이 비판하고자 한 대상은 아닙니다. 고단한 삶, 지루한 일상, 더러운 정치판이 쏟아내는 각종 비리소식에 지친 시민들이 월드컵과 거리응원을 축제로서 즐기고자 하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금의 붉은 악마 현상이 진정으로 '순수한' 자발성에만 기초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국민 모두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논평>은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될 것을 종용하고 '대~한민국'을 외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자들, 그러한 '붉은 악마 현상'을 부추기고 거리에서 생산되는 자생적 문화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해나가고자 하는 '의도된 손'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 기획자들은 다름 아닌 자본과 권력과 언론이며, 그에 동조하여 추악한 아부를 서슴지 않는 지식인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장하시는 그 '순수한' 열기가 자본과 권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오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분들이 칭송하시는 그 '해방의 에너지'가 오히려 '위로부터의 동원 메커니즘'인 파시즘의 제물로 바쳐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이 현상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힘과 이 현상을 통해 생산되는 반인권적 담론들에 일침을 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2. 춤추는 국가주의의 망령에 주목해야 합니다

월드컵은 기본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대항전이기 때문에 국가주의를 고취시키는 요소를 그 자체에 내재하고 있으며, 이를 강렬하게 부추기는 것은 바로 언론입니다. 일본 대표팀의 나카타 선수가 '기미가요'(일본의 국가)를 제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본 우익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아야 했으며, 바로 이러한 순치 과정을 거쳐 기미가요를 따라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우리 언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론은 각종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적 수사를 남발하면서, 스포츠와 열띤 응원이 이루어내는 집단적 일체감을 국가주의로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축구는 ""총성없는 전쟁""이 되고,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어느새 축구선수가 아니라 ""태극전사""가 되며, 독일과 한국의 준결승전은 ""독일 폭격기와 국산 요격기의 대격돌""이 되고, 한국-스페인전은 ""막강 무적함대 스페인호를 격침시킨 광주대첩""으로 명명되며, 한국의 4강진출은 ""남부유럽을 점령""한 것이 됩니다. 또한 언론은 한국팀의 선전이 ""12번째 선수가 함께 뛰기 때문""이라고 거듭 칭송하면서, 5천만 국민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될 것을, '태극전사'들과 함께 뛸 것을 종용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위한 '하나됨'인지, 가슴뭉클한 애국심을 고취시켰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과연 어떤 공동체의 모습을 열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반면 ""붉은 용광로"" 속에 녹아들기를 거부하는 자들, 즉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월드컵 기간에 한사코 '노사평화'를 깨뜨리는 한심한 노동자나 즐기라는 축구는 즐기지 않고 생존권 보장하라며 떼쓰는 노점상들, 혹시 오심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말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국가통합을 해치는, '한국을 떠나야 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개인의 존엄과 권리,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배려, 현실 구조에 대한 비판과 토론의 마당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언론이 호명하고 있는 국가주의라는 망령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광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정복'과 '승리'가 가져다주는 환희에 도취되고, '필승'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지금의 흐름은 지나친 국가주의와 파시즘적 정서와 몰이성에 가속 페달을 달아줍니다. 오판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나라들은 어느새 '우리의 승리'를 도둑질하려는 상종 못할 '적국'으로 매도되고, 한국의 편을 든 나라들은 자연스레 '우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장 비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와 불투명한 재정운영으로 지탄받아온 국제축구연맹(FIFA)은 한국팀의 '4강진출 음모설'을 일축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새 가장 공신력있는 기구로서 추앙됩니다. 그 무엇보다 우리처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 혹 중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 사람 아니냐""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되는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우려했던, 인권과 화합할 수 없는 맹목적 애국심의 실체를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자본-권력-언론의 삼위일체, 그들은 왜 붉은 악마 현상을 '기획'하는가?

언론이 이처럼 '붉은 악마 현상'을 조장하고 국가주의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상업적인 이해 때문입니다. 각 방송사는 국제축구연맹(FIFA)에 수백억대의 중계료를 지불하는 대신, 막대한 광고수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각 방송사는 개막 이전부터 월드컵 총력체제에 돌입하여 16강 진출을 온 국민의 숙원으로 만들어내고, 연예인들을 동원하여 '붉은 악마 현상'을 자극하고, 지금도 각종 묘기대행진을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SK 텔레콤을 비롯한 자본 역시 '4천만이 붉은 악마가 되라'는 캠페인을 주도하고, 거리응원 마당을 제공함으로써 간접광고 효과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과 언론이 국가주의와 기꺼이 영합하여 월드컵 과잉 열기를 주조해내는 근본 동력입니다.

이러한 붉은 악마 현상은 국가권력과 우리 사회의 보수지배세력들의 이해에도 봉사합니다. 물론 지배세력들이 과거 군사독재시절처럼 공포정치와 강제명령에 의해 국민들을 사주하거나 직접적으로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국민들의 의식이 성장한 만큼 지배세력의 대중통치술도 더더욱 세련되고 교묘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억눌려있는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와 현실 구조에 대한 불만이 해방과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승화되지 않도록, 스포츠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와 집단적 환희를 체험하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유도합니다. '스포츠는 깨끗하다'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역전의 드라마와 축구영웅들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반복 재생함으로써, 지루하고 진흙탕 같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무관심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생산·강화되는 국가주의는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비판세력들을 소수로 몰아붙일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에 지배세력들에게는 더더욱 좋은 선물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유치한 또 다른 이유이며, 시청앞 광장을 붉은 악마들에게 선뜻 내주는 이유이며, 그러면서도 질서 캠페인을 끊임없이 벌이는 이유인 것입니다.

지금도 언론사 데스크에는 수십, 수백, 아니 수천 건의 주요한 사건들이 보류되어 있다고 합니다. 경희의료원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월드컵 보도에 밀려 참담한 외면을 당해야 했으며, 축구장과 거리와 인터넷에 넘실댔던 국민들의 반미감정에도 불구하고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두 여중생의 죽음은 사회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월드컵을 제외한 모든 영역의 사안들이 정지되어 있는 셈입니다. 월드컵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불편한' 이야기들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관심영역 또한,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움틀거리는 역동적인 힘에 의해 자발적으로 응원에 참여했다고 믿는 시민들도 과연 자신이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물론 '승리'가 아니라 경기 자체를, 축구가 아닌 축제의 마당을 즐기기 위해 거리응원을 나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많은' 열광들이 '하나의' 의도된 열광으로 발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현실의 대립하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라는 신화' 속에 모두 함몰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4. 지식인들은 낯뜨거운 아부를 멈춰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진보의 색깔까지 덧씌우려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가히 낯이 뜨거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지식인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일반 대중보다 더 '유식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의 공기인 언론의 지면을 독점하고 있는 존재로서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양식'을 환기시킬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국가통합 이데올로기를 선동하고, 민족적 우월감을 자극하며, ""붉은 악마의 핏속에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 인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논평>에 대한 유감(?)을 ""빨갱이들보다도 더 못한 놈들""이라는 욕설로 퍼부어 대는 현실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빨간'색'에 대한 혐오와 곧바로 등치시키고 붉은 옷의 물결을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 단언하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은 가히 천진스러울 정도입니다.

갖은 수사를 동원하여 지금의 '붉은 악마 현상'을 칭송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지금 거리에서 발현된 에너지가 과연 어떻게 진보와 해방의 에너지로 '질적 전환'될 수 있다고 보는지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없이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식을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온 국민에게 붉은 옷을 입을 것을 격려하는 우리 사회가 과연 '원색 옷은 학생답지 못하므로 안된다'는 전근대적 교칙을 앞장서 바꿀 것인지, 한국은 살 곳이 못된다며 이 땅을 떠나는 대대적 이민현상은 사라질 것인지,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한국이 우리와 함께 응원했던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추방을 멈출 것인지, 시청 앞 광장을 선뜻 내주었던 국가가 1인 시위까지 금지하려는 집시법 개정을 그만둘 것인지, 지금의 반미감정이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의 개정으로 이어질 것인지, 지금의 '하나됨'의 환희가 파업 노동자들과 장애인들과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의 고통에 기꺼이 연대하는 진정한 '하나됨'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말입니다. 권력과 자본과 언론이 부추기는 '국익'이나 '민족적 에너지'의 환상은 우리의 이런 고민에 결코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외쳤던 그때, 광주와 6월항쟁의 거리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그 '순수한' 열정들은 그들이 희구하는 그 가치만으로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다른 제3세계 민중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 넘실대는 '타는 목마름으로 4강으로 가자'와 같은 '필승'의 구호들 속에서는 우리 사회의 억눌린 노동자와 민중은 물론, 다른 나라의 민중들과 기꺼이 연대하려는, 자국의 이해가 아니라 인류의 공존을 모색하려는 열린 가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붉은 악마 현상'에 모두가 몰입해 있는 지금,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가통합 이데올로기가 똬리를 틀고 들어앉고 있으며 민주적 권리들에 대한 후퇴와 인권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후퇴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에 불고있는 극우파시스트 세력들의 광풍으로부터 한국은 예외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는 주장에 우리가 딴죽을 거는 이유이며, '축구를 축구로서 즐기고자' 하는 분들도 작금의 현실에 비판적 개입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 세~계최강'을 연호하는 필승의 열망도, '온 국민이 하나'라는 신화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고 파시즘의 발호를 경계하는 인권의 감수성과 실천입니다.

2002년 6월 26일
인권운동사랑방"
문서정보
문서번호 hc00000619
생산일자 2002-06-26
생산처 인권하루소식
생산자
유형 일반문서
형태 설문조사
분류1 인권하루소식
분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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