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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석 씨는 경찰의 과잉폭력진압 과정에서, 최루탄이 난무하는 속에 10-20분간을 달리던 끝에 인쇄소 안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경찰의 무시와 외면 속에 방치된 채로 죽음에 이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왜 내게 말하냐""
노수석 씨가 숨을 거둔 을지로 대현문화사 안에는 노씨외에 4명의 학생들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차동호(한양대 경영 1년)씨는 ""경련을 일으키던 노수석 씨가 '풀어 달라'고 호소하며 고통에 겨워하고 있었다. 노씨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몸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잠시 후, 인쇄소 안까지 쫓아 들어온 전경이 '하라는 공부는 왜 안하고 데모질이야' 라며 심한 욕설을 퍼붓고 우리를 때리며 끌고 갔다. 우리는 노수석 씨가 위독함을 호소했지만 전경은 이를 무시했다"" 고 증언했다.
또한, 노씨를 발견한 인쇄소 주인 아주머니는 ""진압대장에게 '사람이 죽어간다.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말했지만, '왜 내게 말하냐'며 외면했다"" 고 증언했다.
이렇게 노수석 씨는 숨져갔다. 경찰은 그를 살리려던 동료들을 끌고 간데 이어, 구조요청마저 무시하고 외면함으로써 노수석 씨를 죽음 속에 방치했던 것이다.
대책위, ""노씨 사인은 폭력진압""
2일 오후 연세대에서 기자회견을 가진「애국학생 고 노수석 추모 및 김영삼 정권 살인폭력진압 대책위원회」는 진상조사 2차 결과를 통해 ""노수석 군은 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에서 전경들의 구타와 최루탄 피폭, 강압적이고 공포적인 검거위협 속에서 심폐기능의 치명적인 손상을 일으켜 사망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이덕우 변호사(진상규명위원장)는 ""노씨의 부검결과 등부위와 허벅지부분의 근육출혈은 강한 타격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외력에 의해 생긴 것임을 부검의들도 인정하고 있고, 상처부위로 봐서 결코 넘어져 생긴 것으로는 볼 수 없다"" 며 사실상 경찰폭력이 가해졌음을 말했고, 황인성(대책위 집행위원장)씨도 ""이번 사건은 폭력적 진압으로 절명에 이른 타살적 성격의 사건""이라며 ""진상규명과 아울러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또한, 부검에 참여했던 양길승(성수의원 원장)씨도 ""상당히 많은 외상이 있어 노수석 군이 구타 등 외력에 의한 손상을 입었음이 인정된다. 무난히 일상생활을 영위해온 노군이 사망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심장 이상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구타와 최루탄 피폭, 강압적이고 공포적인 검거과정에서 심폐기능의 손상을 강화시켰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노군의 경우 근본적인 사인 못지 않게 당시의 상황과 조건이 중요한 사인이라 할 수 있다"" 고 대책위에 보고했다.
경찰, 검거위주 폭력진압
대책위는 시위진압작전에 참가한 현직 경찰이 전화를 걸어와 ""이날은 평소와 달리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직접 일선 중대장들에게 시위학생을 전원검거 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CCTV를 보며 경찰청 차장이 직접 검거를 독려했다"" 는 제보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시위진압에 경찰 수뇌부가 사전에 조직적으로 폭력진압을 계획했고 지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대학생들도 경찰이 시위 현장에서 뿐 아니라 골목과 점포 안으로 피한 학생까지 쫓아가 연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폭력을 가했다고 증언함으로써, 29일 벌어진 경찰의 진압이 해산위주가 아닌 검거위주의 진압이었음을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
김건극(한양대 3년)씨는 ""학생들은 평화선봉대를 구성하여 비폭력 평화시위를 했으나, 경찰은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두르며 끝까지 쫓아오는 등 종전에 볼 수 없던 과격한 진압 양상을 보였다""고 증언함으로써 경찰의 진압작전이 이미 검거와 폭력을 계획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한편, 4일 오전8시 연세대 교정에서 노씨의 영결식이 거행된다. 장지는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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