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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그녀는 어릴 적 어머니가 자신에게 “선하게 살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자기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말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60세가 다 되는 나이에 수녀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엄마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다지곤 한다.
그런 엄마는 딸이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단체인 ‘두레방’에서 일하며 날마다 집에 돌아와 기지촌여성들의 눈물나는 삶을 들려주자, “흑인 혼혈아를 입양하자”고 나설 정도였다. 자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활동가중에서 운 좋은 편이라고 말하는 정유진(28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간사) 씨.
매일 미군범죄 2건씩 발생
올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93년부터 96년 6월까지 발생한 미군범죄는 2천2백93건으로 이중 재판권을 행사한 것은 1백7건(재판권 포기 2천4백32건)이며, 실형을 산 미군은 7명에 불과하다. 적어도 하루에 2건씩은 미군에 의한 범죄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번 주로 94회를 맞는 미군기지 제1정문 앞 집회는 이렇게 늘상적으로 발생하는 미군범죄와 그 해결인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알리는 장이다. 윤금이 사건을 계기로 93년 10월26일 발족한 「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운동본부)는 올해로 3년을 맞는다. 정유진씨는 창립 때부터 줄곧 한자리를 지켜왔는데, 발족 당시 조재학 간사(현 사무국장)와 같이 시작했고, 지금도 역시 둘이서 운동본부의 실질적인 일을 꾸려가고 있다. “총학생회처럼 일한다”며 운동본부에 들어와 10키로 가량 몸무게가 줄었단다.
모두 미군범죄 피해대상자
일은 고되지만 그러한 노력으로 금요시위가 정착화된 변화 외에도 미군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요구가 달라졌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특히 작년 5월 충무로 지하철에서 미군이 한국인 여성을 성희롱하는데 항의하던 시민이 집단폭행 당한 사건을 생각하면 이 일을 하는 확신을 느낀다. 바로 조정국씨 사건은 미군범죄 문제가 비단 기지촌 지역이나 주변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국민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 일을 계기로 단일사안으로는 최장기간인 6개월간 서울역에서 서명작업을 벌였다. 매주 금, 토요일 4시간씩 서명을 받았는데 지나가던 시민들은 줄을 서서 서명을 할 정도였고, 군인 경찰들도 서명을 하는가 하면 기차역에서 나눠주겠다며 유인물을 받아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 일이 미군범죄에 대해 한국민의 자존심을 살린 사건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87년 세종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4학년 때는 부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세종대 학원자주화투쟁은 1학년 입학당시부터 줄기차게 벌어졌는데 4학년 때는 1백67일 동안 하루 세 번씩 집회를 조직했다. 1년 동안 수배생활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하루 2번씩 집회를 진행했다. ‘학원자주화 투쟁에 대한 마지막 평가서를 쓸 때까지는 잡혀선 안 된다’는 오기로 버텼다. 당시 밥만 먹으면 거의 다 토해낼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평가서를 쓴 상태에서 두레방을 찾아간다. 이미 학생회 때 기지촌여성이 만든 빵을 팔러왔던 두레방 사람이 놓고간 소책자에서 기지촌 여성문제를 접하게 되었고,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뒤였다.
미군 재평가사업 준비
두레방 활동을 시작한지 2개월만에 잡혀가 다시 2개월간 성동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91년 5월1일 ‘보석같은 체험’을 마치고 출소한다. 그뒤 전국재적생복적추진위원회를 사업을 시작하는데, 자신이 복교하는 것이 세종대투쟁의 마무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생활 2년째로 접어드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난다. 그는 구치소생활을 마치고 나오면서 신랑도 감옥경험을 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고. 그의 뜻대로 남편은 3번의 감옥살이 경험을 갖고 있었다. “생각이 같고 친구이면서 존경하는 사이”- 이것이 바로 정유진 씨가 그리는 부부 모습이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일들을 치르고 나지만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미군주둔으로 인한 재평가사업으로 그간의 자료와 성과를 모아 ꡔ미군 51년 자료집ꡕ을 준비할 예정이다.
올해 4월부터 4개월간 그는 비상근 간사로 일하며, 대학원 시험준비를 한 적이 있다. 비록 낙방했지만 운동본부 살림이 안정되면 재도전을 할 생각이다. 미군범죄의 한 영역 중에서 기지촌여성문제-그는 기지촌 여성을 ‘분단된 조국의 뒤껸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를 정립해 내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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