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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인도네시아 군대의 무력침공 이후 동티모르 문제는 한동안 국제사회에서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티모르에 대한 국제사회의 무관심을 일거에 뒤집어 전 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사건이 있었다. 바로 91년 11월12일 발생한 ‘산타크루즈 묘지 대학살’ 사건이다.
포르투갈은 82년 안토니오 라마료 에아네스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동티모르 문제를 국제외교무대에 적극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91년 여름, 포르투갈 의원단의 동티모르 방문교섭이 타결되어, 늦어도 11월4일에는 방문이 이뤄지게 되었다. 전 세계 동티모르 연대그룹들은 포르투갈 의원단 방문과 때를 같이해 동티모르 상황을 감시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속속 동티모르에 잡입했다.
그런데 갑자기 동티모르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곳곳에서 테러가 계속되었으며, 포루투갈은 10월26일 의원단 방문중지를 발표했다. 발표가 있은 바로 다음날, 인도네시아군은 독립운동가들이 피신처로 자주 이용하던 딜리시의 모타엘 교회를 밤새도록 습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독립파 청년 세바스찬 고메스가 살해됐다. 고메스의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동티모르의 관습에 따라 고메스가 죽은지 2주되는 11월12일을 맞아 사람들은 그가 안장된 산타크루즈 묘지에 가기로 했고, 그 기회를 이용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일 3천5백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묘지에 도착한지 15분후 군대가 나타나 좁은 묘역에 갇힌 군중을 향해 경고 없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포루투갈의원단 방문 보도를 목적으로 현지에 와 있던 서방측 여러 기자들에 의해 목격되어 삽시간에 전 세계에 보도되었으며, 동티모르 문제의 전개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 92년 9월 포르투갈에서 동티모르인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 2백73명, 실종 2백55명, 부상 3백76명으로 집계되었다. 인도네시아는 국제여론에 밀려 현장 하급병사 10명에게 8월-1년6월형을 선고했으나, 시위주모자들은 종신형, 15년형 등 엄벌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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