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고> 중동분쟁 : 도전 받는 ‘평화의 길’ -엄한진 (정치학박사, 북아프리카 전공)
내용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뿌리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시작된다. 동일한 언어와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민족국가 체제 형성과정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살던 유럽, 특히 동 중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받거나 이주하게 되었다. 

유태인은 당시 만들어진 민족차별의 대표적 희생양으로서 유럽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정치적 울타리를 형성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집단이민이라는 해결책을 찾게된다. 나치문제가 그렇듯이 유럽에서 파생되었지만 유럽에서 해결되지 못한 유태인 문제가 영국 프랑스의 아랍세계 지배전략과 맞물려 그들의 먼 조상의 땅으로 이전된 것이다. 이전된 것은 단지 박해받던 사람들만이 아니다. 그들이 겪었던 반유태주의는 또 다른 인종적 배타주의로 이어지고, 그들의 고립된 삶의 경험은 아랍인들과의 공존의 가능성에 눈을 감게 하였다.

동구출신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점령하자 조상대대로 이 지역에 살던 아랍인들은 추방됐다. 더불어 아랍 각지에서 아랍어와 아랍문화 속에 살던 아랍-유태인들은 어쩔 수 없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야 했다. 48년 이스라엘 국가 창설부터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요르단 통치하의 요단강 서안, 동 예루살렘,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한 67년 6월 전쟁까지 이스라엘 팽창주의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 국제법을 무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서구의 절대적 지지는 무엇보다도 나치학살로 절정을 이룬 유럽인들의 유태인 박해에 대한 속죄로 설명될 수도 있다. 유럽인의 죄의식에 기대 역사의 사생아가 된 이스라엘 민족주의는 중동에 또아리를 튼 것이다.

6일 전쟁은 아랍세계의 대 이스라엘 저항능력의 한계를 확인시켜 주었으며, 이후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와 미국의 이 지역 보루인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의 이슬람 근본주의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다른 한편 이 전쟁은 그간 유태인 문제에 가려져 있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카우보이로, 토착 아랍인들을 인디언으로 여기던 서양인들에겐 팔레스타인인들도 인디언들처럼 보호구역이 필요하다는 정도의 생각에 그쳤다. 이러한 문제해결 방식이 사다트의 역사적인 예루살렘 방문(77년)이 계기가 된 캠프 데이비드 조약(78년)의 중심축이 된다.

70년대 이후 석유를 매개로 한 아랍세계의 친 서방화 경향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진전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주 대립구도를 이스라엘-아랍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국보호령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은 이스라엘 성립 후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전개되었다. 사실 수백 개의 마을방화 및 학살을 모면해 이스라엘에 남을 수 있었던 소수의 아랍인들은 저항을 조직하기에는 너무 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 대부분은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이나 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자-예리코 난민촌에서 생활한다. 이들의 생활조건은, 경제상태가 피폐한 이웃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피난민의 어려움을 아무리 고려하더라도, 가자 지구에 사는 4천명의 정착 유태인들보다 8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용하는 물의 총량이 더 적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50만 명이 피난민이고 20만 명이 집단난민촌에 살고 있다.

50년대부터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있던 레바논에서 아랍지식인들의 연대로 형성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은 70년대 이후 PLO(64년 창설)를 중심으로 낫세르의 민족주의에 뒤이어 아랍세계의 주도적 정치세력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일으켰으나 이스라엘이 아닌 레바논 분열의 원인이 된다. 즉 PLO의 레바논 남부거점을 공략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82~88)은 이 지역에서 드물게 종교적 다원주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던 레바논에 종교집단간의 분쟁의 씨앗을 심게된 것이다.

70년대 팔레스타인 영토의 5%를 차지하는 가자와 예리코의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의 과도기적 자치를 약속한 오슬로 조약을 통해 PLO는 화려하게 국제무대 등장했다. 이는 또한 90년대에 정착되고 있는 중동의 새로운 지역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냉전종식, 걸프전 그리고 PLO의 현실주의 노선 채택으로 이뤄진 오슬로 조약은 중동평화의 길을 여는 결정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세세히 언급한 오슬로 조약은, 이제 평화협상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진전과정이 아니라 경제협력 방안 마련을 통해 도출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 조약이다. 아랍국들은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기대하게 됐고, PLO 역시 이 전망을 공유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전 영토에 대한 군사주권 행사를 용인한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온전한 국가로서, 중동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이제 이런 방식의 ‘평화’는 부정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그러나 오슬로 조약에 뒤따른 아랍 서방의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동대응은 완전한 의미의 평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고집하는 세력과 새로운 지역질서가 초래하는 갈등의 분출을 억누르면서 이루어질 평화라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미국 이스라엘이 주도하고 관련국들과 세계여론의 지지로 전개되고 있는 평화협상의 논리에서 볼 때, 현실에서의 긴장관계 지속은 평화정착과 함께 사라질 역사의 잔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의 미래의 수도가 들어설 요단강 서안과 아랍인 지구에서의 토지몰수, 유태인 정착촌의 확대, 이스라엘 군대에 의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통제, 고립이 가져오는 생활여건의 악화, 팔레스타인 노동력을 아시아 동구노동자들로 대체하는 이스라엘의 고용정책 등도 긴장의 현실과 낙관적 평화협상간의 모순이 증폭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슬로 조약 실행의 지지부진과 최근 분쟁의 격화는 현재 진행중인 방식인 ‘평화의 길’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문서정보
문서번호 hc00000718
생산일자 2001-05-08
생산처 인권하루소식
생산자 엄한진
유형 도서간행물
형태 정기간행물
분류1 인권하루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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