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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로 백주년기념관을 지나 이한열 열사 추모비 앞은 전경대열로 가득 찼다. 이곳은87년 6월 살인적 최루탄 난사로 숨진 이한열 열사의 넋이 잠든 곳이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맥을 이어 놓으면서 국민들을 거리로 이끌어냈다.
바로 그 교정 여기저기에는 헬기에서 빨간색을 섞어 뿌린 최루액이 남아 진달래 빛을 띠고 있었다. 대형 플래카드가 걸린 학생회관 창문은 깨지고 불길에 그을려 거무르름했다.
이과대 건물 앞에 쌓아둔 바리케이트에는 공권력의 침입에 대비해 불이 붙여지고 간간이 취루탄 발사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여름밤 매미울음소리 보다도 귀를 때리는 것은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였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과대와 문과대 건물에서 만난 학생들은 “자진해산을 하겠다는 데도 안받아 들인다. 사방이 막혀있어 나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말했다. 15일 학생들은 전경 2개 중대를 무장해제 시킨 뒤 전경들을 그대로 돌려보냈다는데, 여기서 언론이 말하는 과격시위의 허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경찰측에서 강경하게 나온다면 자신들도 그냥 있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제2의 건대 사태가 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강경진압을 할 경우 우리쪽 보다도 전경들이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할 지도 모른다”며 기자에게 속히 이곳에서 내려가길 재촉했다.
“무사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나눈 한 학생의 얼굴이 잊혀지기도 전인 밤10시 경찰의 검거작전이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구속자 1백여명을 넘길 것이라는 경찰측의 예상대로 대량 구속사태가 우려되는 속에 건대사태, 동의대 사태가 무겁게 떠올랐다. 86년 10월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 사건(일명 건대사태)으로 사상최대 1천2백90명이라는 구속자를 낳은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89년 5월 부산 동의대에서 농성중인 학생들을 강제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인해 경찰 7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 언론은 원인규명을 방기한 채 과격시위로 학생들을 매도했고 72명이 구속.기소, 30여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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